[노트북을 열며] 국민 상대 정치 한다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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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권이 국민을 상대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섰다. 임동원(林東源)통일부장관 해임건의안 표결에서 패하자 고심 끝에 짜낸 방법 같다.

민주당 최고위원 회의에선 "민간.종교.시민단체와 긴밀히 대화하자" 는 주장이 나왔다. "국민을 상대로 경제에 초점을 맞추자" 거나 "시.도별로 국민의 소리를 수렴하자" 는 제안도 들린다. 야당은 대통령의 방송출연과 종단 대표들 면담을 국민 상대 정치라고 주장했다.

*** 당 친정체제.국회 무력화

여권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국회에서의 수적 열세를 극복할 묘안이 없을 것이다. 그만큼 통일부장관 해임건의안에서 나타난 여야의 29표 차이는 크다.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찬성 주장이 얻은 1백48표와 민주당 반대 주장 1백19표의 차이는 전체 의석의 10%를 조금 넘지만 결정적 파괴력을 지녔다.

이제 여권은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반대하는 사람은 총리도 시킬 수 없다. 언제든 총리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통해 사실상 내각을 불신임당할 수도 있다. 새해 예산에서 북한에 대한 지원액을 대폭 삭감당해도 속수무책이다.

그러면 햇볕정책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야당이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국정조사에 청와대와 국세청 관계자들을 줄줄이 증인으로 소환해도 저지할 방법이 없다. 다른 사안에 대해 국회차원의 조사를 하자고 해도 못 막는다. 야당에선 특검제를 도입하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청와대와 민주당으로선 소름 끼칠 일이다. 이제 야당들은 대통령 탄핵과 헌법개정만 빼고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이 두가지는 국회의원 재적 3분의2 이상 찬성이 필요하지만, 각종 법안을 만들고 고치는 것은 물론 국무위원이나 법이 정한 공무원을 탄핵하는 데는 과반수인 1백36석만 있으면 된다.

그렇다고 여권이 자민련 김종필(金鍾泌)명예총재와 공조복원을 할 수도 없다. 이한동(李漢東)총리까지 잔류시켜 감정이 상할대로 상한 마당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과 손잡기도 여의치 않다. 자칫하면 무장해제 당하고 정권을 내준 것이나 같은 결과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국민을 상대한다고 나선 것 같으나 이 방법은 성공하기 힘들다. 이미 국민을 직접 상대하자는 정치는 여러번 시도됐고 그때마다 실패했다.

1988년 4.26 총선에서 패한 집권 민정당의 예도 그 하나다. 민정당은 과반수인 1백50석에서 25석 모자란 1백25석을 얻었다. '집권당=과반수=정국안정' 이란 등식에 익숙했던 여당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서 여권은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정치를 예고했다.

당시의 야당 총재는 평민당 김대중(金大中), 민주당 김영삼(金泳三), 공화당 김종필 총재였다. 이들 3金은 여당의 '국민 상대' 에 맞서 회동을 하고 "정치의 중심은 국회" 라고 선언했다.

그리곤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이 지명한 정기승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부결시켰다. 이후 총선 때마다 여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고, 그 때마다 국민 상대 운운했지만 제대로 된 적은 없었다.

이런 국민 상대 정치는 성공해도 곤란하다. 이같은 발상에는 국회를 무력화하겠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다고 국회를 외면하면 적어도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자세는 아니다.

*** 野와 함게 문제 풀어가야

만일 성공하면 국회는 존재할 이유를 잃게 된다. 결과적으로 의회민주주의는 설 땅이 없어진다. 이처럼 여당이 국회가 국민의 대표기관임을 부정하면 야당은 격렬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첨예한 여야의 대치는 정치현장을 전쟁터로 만들 것이다.

여당은 생각을 바꿔 야당을 상대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국회 안에서 대화하고 타협해야 한다. 마음 안내키고 짜증나더라도 다른 방법은 없다. 밀리기만 하는 여당의 모습이 안타깝고 야당이 무리를 한다고 국민들이 판단하면 다음 선거엔 여당에 표를 줄 것이다.

김교준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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