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산책] 정부가 앞장선 프랑스 역사 참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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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국제 전쟁범죄에 대해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여왔던 프랑스가 전쟁범죄 혐의로 고발됐다.

알제리 전쟁(1954~62) 당시 프랑스편에 가담했던 알제리 현지인 보충병 '아르키' 와 그 후손 등 9명은 지난달 30일 프랑스의 '반인도주의 범죄행위' 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프랑스 법정에 제기했다.

"잊혀져가는 과거를 올바르게 기록하기 위해서" 라는 게 40년 만의 소송 사유다.

사실 아르키는 일본의 '정신대' 문제 만큼이나 프랑스 역사의 부끄러운 한 단면이다. 프랑스 정부는 62년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하고 80만명의 재외 국민을 철수시키면서 10만명에 달했던 아르키들 중 2만여명만을 프랑스로 데려왔다.

조국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던 나머지 8만명의 아르키들의 운명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프랑스에 버림받고 무장해제까지 당한 그들은 부역행위자로 낙인찍혀 잔혹한 보복을 받았다.

생존자들과 그 후손들 약 40만명이 현재 프랑스 남부 지방에 정착, 알제리의 멸시와 프랑스의 무관심 속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도 그동안 이 문제에 대해 외면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역사 교과서는 20여년 전부터 알제리 전쟁에 상당량을 할애하고 있다. '알제리 전쟁에 대해 논하라' 는 문제도 대입 수능시험인 바칼로레아의 단골 메뉴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와 학계.교육계는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 교육부 주관으로 지난달 29~31일 열린 중.고 교사 여름 수련회에서는 "결코 흘러가 버리지 않은 과거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역사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아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는 불만의 목소리도 터져나왔다. 이에 대해 자크 랑 교육부 장관은 "알제리 전쟁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게 사실" 이라고 인정하고 보다 정확한 역사 기술을 위해 학계.교육계가 정진해줄 것을 당부했다. 실제로 프랑스 정부는 연구를 위해 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관련 문서를 공개할 것과 알제리 전쟁에 대한 수업 시간을 더욱 늘릴 것을 약속했다.

이와 함께 사상 처음으로 아르키들을 포함한 알제리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를 위해 9월 25일을 국경일로 선포했다. 이번 소송을 계기로 잊고 싶은 과거인 알제리 전쟁에 대한 프랑스의 재인식 노력은 보다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훈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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