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24시] 고이즈미식 '일방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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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잇따른 '돌출 행동' 이 비난을 받고 있다. 고이즈미는 지난 24일 휴가에서 돌아오자마자 느닷없이 외무성에 한국.중국 방문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명분은 10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정상회담에서 한국.중국 정상을 갑자기 만나면 어색할테니 그 전에 만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꽁꽁 얼어붙은 관계를 풀어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이즈미의 이와 같은 지시 내용은 상대국과의 사전협의 없이 일본 언론을 통해 일방적으로 발표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중국의 불쾌감이 오히려 더 커졌다.

그러자 고이즈미는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외상에게 다음달 19일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하라고 지시했다. 이 회의의 의장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다. 또 사카구치 지카라(坂口力)후생노동상과 하야시 요시로(林義郞) 중.일우호의원연맹 회장을 한국과 중국에 보내 관계개선 의지를 표명할 계획이다.

고이즈미의 이런 행동을 보면 적어도 겉으로는 일본이 사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고이즈미의 노력이라는 게 내용없는 외침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우선 이렇게 안달할 것을, 왜 애시당초 문제를 일으켰는지 반문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이즈미는 총리로 선출된 후 계속해 "일단 야스쿠니 신사 참배부터 하고 나서 대화하겠다" 고 강조해왔다. APEC 이후의 일을 염두에 뒀을 수도 있다.

그는 APEC 후 곧바로 베이징(北京)으로 가 중.일 정상회담을 열 계획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게 그의 뜻대로만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현재의 분위기다.

무엇보다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정상회담만 하면 문제가 해결될 듯이 행동하는 고이즈미의 태도가 과연 한국.중국과의 관계정상화에 기여할 것이냐는 의문이 든다.

문제해결을 위해 간다고 한다면 최소한의 노력, 예컨대 "내년부터는 야스쿠니에 가지 않겠다" 는 정도의 약속은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고이즈미가 한국과 중국을 방문하려는 진의를 모르겠다" 는 지적이 많다. 고이즈미는 한.일, 중.일간의 앙금은 단순히 정상회담이라는 형식적 만남을 통해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진지한 반성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오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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