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불편부당 (不偏不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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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하이에나 저널리즘, 홍보 저널리즘, 밴드왜건 저널리즘…. 한국 신문을 설명할 때 동원되는 용어들 몇개다.

사회적 영향력이 떨어졌다 싶은 인사에게 가혹한 융단폭격을 하거나(하이에나 저널리즘), 수박 겉핥기(홍보 저널리즘) 내지 몇몇 스타에 집중되는(선두마차 저널리즘) 제작 방식에 대한 지적이다. 언론학자들은 카멜레온 저널리즘, 살롱 저널리즘이란 말도 구사하지만, 국내 신문의 최대 특징은 따로 있다. 정리하자면 '불편부당(不偏不黨)저널리즘' 쯤이 되리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립보도를 하겠다는 맹세의 말이다. 이 제작이념의 기원은 실로 유구하다. 3.1운동 직후에 나온 민간지들이 그걸 사시(社是)로 내걸었다. 문제는 객관.중립보도의 함정이다.

전설적 언론연구서 『일제하 민족언론사론』(1978, 일월서각)의 저자 최민지가 "객관보도란 실은 가장 무책임한 태도" 라고 공격했음을 음미해볼 일이다. 민중의 신음소리를 외면하겠다는 말과 뭐가 다르냐는 엄한 꾸중이다.

어쨌거나 지금까지도 불편부당을 신조로 알고 있는 우리네와 달리 근대 이후 서구 신문의 패러다임 전환은 변화무쌍하다. 서구사회의 초창기는 각 정파들의 이익을 반영하는 파르티잔(政派)저널리즘이 유행했다.

하지만 너무 혼란스럽다는 판단과 함께 불편부당 저널리즘이 바로 이때 등장했고, 그게 신통하게 효율적이지 않다는 확인을 거쳐 방향을 다시 틀었다. 60년대 이후 속 깊은 탐사보도, 혹은 가치판단을 앞세운 뉴저널리즘이 그 열매들이다. 문제는 서구 신문의 패러다임 전환 시도와 따로 노는 것이 바로 한국 땅이다.

그만큼 제작이념에 관한 철학적 모색이 드물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누구라도 짐작하겠지만, 역시 권력과 긴장관계에 있는 국내 신문의 특수성은 신문제작의 패러다임에 대한 다양한 시도를 막고 있는 요소다.

결과적으로 1백년 근대 신문역사인데도 먼지 낀 제작 유산인 불편부당을 신줏단지처럼 끼고 있어야 하니 답답하다. 그러나 상식과 달리 객관이란 완전 허구(虛構)의 세계다.

왜 그런가? 고전물리학이 낳은 맏아들이 바로 객관성인데, 반세기 전 뉴턴 물리학을 대신한 양자물리학이 나오면서 사실상 종을 쳤다.

알고 보면 신문 제작 문법의 변화도 꼭 같은 궤적이다. 마침 젊은 물리학도인 정재승(고려대)교수가 쓴 신간 『과학 콘서트』(동아시아)도 현대물리학의 새 패러다임을 환기해준 바 있다. 한국 사회는 물리학 공부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조우석 문화부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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