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됨’ 이 무죄 판결 기준? … 한명숙 전 총리 무죄 공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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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본인의 기억과 다른 진술을 쉽게 할 수 있는 성격.’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는 곽영욱(사진) 전 대한통운 사장의 ‘사람됨’을 이같이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 사람됨을 토대로 곽씨의 말을 의심했고, 한 전 총리에 대한 무죄 판결에 반영했다. 이에 검찰은 “재판 몇 번으로 곽씨의 인간 됨됨이를 알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비판했다.

재판부 판단은 대법원 판례에 따른 것이다. 2002년 6월 대법원은 당시 박종진 경기도 광주시장의 뇌물혐의를 무죄로 확정하면서 “금품을 줬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사람됨을 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뇌물 공여자의 인간됨이 진술의 합리성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라는 것이다. 미국 법정에서도 사람됨과 비슷한 ‘성격 증거(Character Evidence)’가 종종 사용된다. 한 전 총리 재판에서 검찰은 “곽 전 사장은 확실한 말만 하는 분”이라고 했지만 재판 결과에 반영되지 않았다.

한명숙 전 총리가 11일 서울 합정동 노무현재단에서 무죄 판결과 관련해 대통령의 사과와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의 사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참석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왼쪽부터 민주당 박주선 최고위원,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 한 전 총리, 민주당 김진표 최고위원, 이해찬 전 총리. [연합뉴스]

‘신성해운 로비’ 사건에서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이 기준에 따라 무죄를 선고받았다. 정 전 비서관은 2004년 사위였던 신성해운 이사 이모씨에게서 세무조사 무마를 대가로 현금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하지만 지난해 5월 항소심 재판부는 “사위 이씨가 학력·경력을 속인 전력 등을 볼 때 도저히 믿음이 안 간다”며 “사람의 인간됨에 비춰보면 돈을 줬다는 진술을 믿을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반면 지난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정치권 로비 사건에서 뇌물·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자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1심에서 대부분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재판부는 지난해 9월 “박 전 회장이 피고인을 대하는 태도 등을 볼 때 거짓으로 말을 꾸민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중요한 만남이 끝날 땐 꼭 돈을 챙겨주려 한다는 점, 다이어리 등 증거를 보여주면 이내 혐의를 시인해 온 점 등 박 전 회장의 사람됨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고 전했다.

서울중앙지법 김상우 형사공보판사는 “변양호 전 재경부 국장의 현대차 부채탕감 로비 사건에서도 같은 기준이 적용돼 무죄 판결이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검은 11일 자료를 내고 “곽씨 진술의 신빙성만 문제 삼고 한 전 총리 주장의 신빙성은 판단하지 않은 반쪽짜리 판결”이라고 반박했다.

검찰은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는 합리성, 객관적 상당성, 그 인간됨 등을 아울러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인사와 관련해 5만 달러를 갖다 줬다는 게 곽씨의 진술이고 직접 겪지 않고는 꾸며내기 어려운 부분까지 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검찰은 “곽씨의 진술이 (한 전 총리에 비해) 훨씬 믿을 수 있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최선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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