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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고 정봉수 코오롱 육상단 감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1990년대 한국 마라톤 중흥기를 이끌었던 정봉수(鄭奉守)코오롱 육상단 감독이 지난 5일 밤 별세했다. 66세.

한 번 옳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성격을 가진 고인에겐 따르는 사람만큼 싫어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鄭감독이 침체된 마라톤을 일으켜 세운 한국 육상계의 거목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던 53년 입대한 鄭감독은 육상 특기병으로 육군 원호단(현 상무) 육상팀에 들어가 달리기와 인연을 맺었다. 3군 체육대회 단거리 종목을 휩쓸기도 했지만 태극마크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가 거듭난 것은 87년 코오롱 육상단 초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다. 이 시절 그는 김완기.황영조.이봉주.권은주 선수 등을 발굴해 한국 최고의 선수로 키워냈다.

'정봉수 사단' 으로 불리는 남녀 마라토너들은 각종 대회를 휩쓸었다. 90년부터 이 종목의 한국 최고기록을 일곱 번이나 갈아치웠고, 2시간20분대를 맴돌던 남자 한국기록을 2시간7분대로 단축했다.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황영조 선수가 손기정옹의 36년 베를린 올림픽 제패 이후 56년 만에 금메달을 따면서 몬주익 신화를 창조했고, 鄭감독은 세계적인 마라톤 지도자로 떠올랐다.

'독사' 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스파르타식 훈련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러나 선수 관리에 있어서는 과학적이었다. 지도자로서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한국 선수들이 일본 선수들과 체격조건이 비슷한데도 기록이 뒤지는 것을 의아해했던 그는 오랜 연구 끝에 탄수화물 위주의 식이요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탄수화물을 적게 먹는 대신 단백질을 많이 섭취하는 새로운 식이요법을 개발했다. 반발하는 선수들에게 鄭감독은 고무 주머니 두 개를 가져와 한 쪽에 밥 한되 분량을 넣고, 다른 쪽에 한 홉 분량의 밥을 넣어 선수들에게 두시간 동안 흔들어보도록 했다. 당연히 밥을 많이 넣은 주머니가 더 처졌고 이를 본 선수들은 鄭감독의 뜻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鄭감독은 웨이트 트레이닝, 인터벌 트레이닝 등의 선진 훈련방식도 도입했다. 그런 새로운 시도에 대해 국내 육상계는 냉소적이었으나 그는 보란듯이 성공을 거두며 현대적 훈련방식의 틀을 잡았다.

그러나 "일생 동안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많았다" 는 임상규 삼성 육상단 코치의 말대로 그의 지도자 생활이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96년 가을 고인은 당뇨 합병증과 중풍으로 쓰러졌다. 이후 병마와 싸우면서도 선수들을 지도했으나 코치 인선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99년 이봉주 등 선수 전원이 그의 곁을 떠났다.

하지만 鄭감독은 임진수.김옥빈 등 새 유망주를 발굴하며 마지막 의욕을 불태웠다. "이들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것을 보기 전까지 죽지 않겠다" 고 병석에서 다짐하곤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차가운 승부사의 기질을 지녔던 鄭감독이지만 가슴만은 누구보다 따뜻했다. 후배 이의철(54)씨는 "겉으로는 선수들을 엄격하게 대하면서도 늘 그들에 대한 걱정을 달고 다녔다" 고 회고했다.

둘째딸 명수(40)씨는 "선수단 숙소에서 살다시피 하면서도 다이빙 선수였던 나를 찾아와 훈련하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다 돌아가시곤 했다" 고 말했다. 빈소는 서울중앙병원이며 발인은 9일 오전 7시. 02-3010-2370.

이철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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