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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카르텔 주의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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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요즘 한국 기업 잘나간다는 칭찬이 워낙 많다 보니 또 무슨 쾌거를 올렸나 하기 십상이겠다. 하지만 이건 한국 기업이 최근 몇 년간 카르텔 혐의로 미국 경쟁당국에 얻어맞은 벌금 액수다. 미 법무부가 적발한 역대 벌금 상위 10개 업체 중 한국 기업이 4개나 된다. 이제까지 미국이 한국 기업에 부과한 벌금은 12억4216만 달러(약 1조4000억원)에 달한다. 애써 수출해 벌어들인 달러가 허망하게 뭉텅이로 빠져나간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소송 천국’ 미국에서 카르텔로 일단 적발되면 또 한번 곤욕을 치러야 한다. 벌금과 별개로 막대한 배상금을 노린 집단소송이 기다리고 있다. 업체들이 쉬쉬하고 있어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소송 합의금과 변호사 비용으로 나가는 돈도 벌금 못지않을 것이다. 카르텔에 가담한 임직원 개인에 대한 법 집행도 세졌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가 연루됐던 D램 사건에선 법인과 별도로 두 회사 임원 10명이 25만 달러씩 벌금을 내고 5~14개월간 징역을 살았다.

한 나라에서 적발되면 다른 나라도 가만있지 않는다. 어느 나라나 카르텔은 시장경쟁을 막는 가장 질 나쁜 행위로 규정해 최우선으로 규제한다. 한국 기업은 미국에 이어 유럽연합(EU)에서도 국제항공화물운송·D램·초박막액정표시장치(TFT-LCD) 등 분야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

카르텔 규제 움직임은 미국·유럽을 넘어 브릭스(BRICs)와 개발도상국으로 퍼지고 있다. 브라질 룰라 대통령은 2008년 카르텔과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최근 발트해 연안의 소국 라트비아에선 직원 수 45명에 불과한 경쟁당국이 삼성전자에 850만 달러의 과징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한국 기업이 외국에서 담합으로 잇따라 적발되고 있는 것은 우리 수출이 세계 9위에 오를 정도로 활발하기 때문이다. 활동영역이 넓다 보니 각국 당국의 감시망에 자주 포착된다. 인적 네트워크에 많이 의존하는 한국식 영업관행도 문제다. 영업사원끼리의 단순한 정보교환도 담합으로 몰릴 수 있다. 지연(地緣)·학연(學緣)부터 군대 인연까지 따지는 우리의 기업문화는 그래서 담합에 더 취약하다.

공정위가 유럽·미국·중국을 돌며 현지 한국 기업에 카르텔 예방교육을 하기로 한 건 잘한 일이다. 이미 외국 경쟁당국에 큰코다친 대기업은 카르텔의 무서움을 몸서리나게 느꼈을 것이다. 중견 기업이나 수출 중소기업에도 이를 충분히 알려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

특히 우리 공정위도 세계적인 추세에 발맞춰 눈에 불을 켜고 국제카르텔을 감시해야 한다. 나라 밖에서 호되게 당하는 우리 기업들을 보면서 감정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글로벌 기업 몇몇이 짬짜미해 가격이나 물량을 주무르면 수입가격이 비싸지고 결국 우리 국가경쟁력에도 나쁜 영향을 미친다. 공정위는 외국 전문지를 인용해 경쟁법 분야에서 자신들이 ‘세계 7위권’이라고 숱하게 공언해 왔다. 그 실력 좀 제대로 한번 보여달라.

서경호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