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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이 가장 만나고 싶어했던 ‘매력남’ 왕스샹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991년 7월 팡자위안에 있던 왕스샹(오른쪽)의 서재. 전형적인 중국 사대부의 서재로 일컬어진다. 책상, 의자, 화분 받침, 침상 등이 모두 명대(明代)의 것들이다. 현재 상하이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당대(唐代)의 불상과 다기들도 많았다. 김명호 제공

우쭈광(吳組光)의 집 건너편에 쓰촨(四川)요리 집이 문을 열었다. 숙친왕(肅親王)의 막내딸이 주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사실이라면 친언니는 한간(漢奸)으로 총살당한 동양의 마타하리 진비후이(金璧輝), 일본명 가와지마 요시코(千島芳子)였다. 왕녀(王女)가 어떻게 생겼는지 두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로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 주인이 미혼이라는 것까지 알려지자 오후 서너 시부터 사람들이 뱀처럼 줄을 섰다. 쓰촨요리 집에서 각자 볼일을 마친 문화인들은 으레 우쭈광의 집을 찾았다. 우의 집은 완전히 ‘신(新)이류당’으로 변했다.

쓰촨요리 집 덕분에 우쭈광의 집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감당하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우는 곯을 대로 곯았다. 꾀를 냈다. 유명한 식당이 없는 곳에 집을 한 채 구입해 상하이에 있는 부모를 모셔오면 손님들의 발길이 줄어들겠거니 했다. 부친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고궁박물관 소장 문물들을 남쪽의 안전한 지역으로 옮긴 ‘고궁 문물의 수호신’이었다. 노인에게 인사 오는 사람이 많았다. 인근에 이름난 식당은 없었지만 교통이 너무 편했다.

우쭈광은 골병이 들었지만 수확도 있었다. 쓰촨요리를 먹으러 왔던 왕스샹(王世襄)이 이류당을 제 발로 찾아왔다. 왕은 푸젠(福建)의 대대로 내려오는 망족(望族) 집안 출신이었다. 어려서부터 영어가 유창했다. 부친은 외교관이고 모친은 평생 금붕어만 그린 중국 최초의 영국 유학생 출신 화가였다. 왕은 법과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형사 재판을 한번 방청했다. “죄지은 사람들 앞에서나 큰소리치는 한심한 직업”이라며 생각을 바꿨다. 부모가 의과대학을 권했다. 입학해 보니 체질에 맞지 않았다.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치료하기는커녕 생사람 잡을까봐 겁이 났다.

개(犬)·비둘기·매·귀뚜라미 등을 데리고 노는 것이 훨씬 재미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대학을 마칠 때까지 놀기만 했다. 곤충과 동물들이 친구였다. 가을에는 귀뚜라미 싸움에 넋을 잃었고 겨울에는 곤충들을 품에 넣고 다니며 우는 소리를 즐겼다. 매를 날려 토끼를 쫓고, 개들과 함께 오소리를 잡으러 다녔다. 아무리 놀아도 피로하지 않았다. 애지중지 키우던 비둘기를 멀리 날려 보낼 때는 내가 자유를 얻은 듯 통쾌했다.” 책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옌징(燕京)대학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아침 눈이 부리부리한 매 한 마리를 어깨에 얹고 등교하는 학생을 볼 수 있었다.

문혁 기간인 1972년 후베이(湖北)성 셴닝(咸寧)의 57간교(干校)에서 노동 중인 왕스샹. 자연 속에서 소와 함께 있다 보니 항상 즐거웠다고 훗날 회상했다. 김명호 제공

1939년 왕스샹은 모친을 잃었다. 야단칠 사람도, 감싸줄 사람도 없다 생각하니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가 없었다. 모친이 그렇게 좋아하던 중국고대회화(繪畵)에 갑자기 정이 갔다. 5년에 걸쳐 ‘중국화론연구(中國畵論硏究)’를 완성했다. 70만 자에 달하는 대작이었다. “3년상은 너무 짧았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모친에게 선물을 하고 나니 홀가분했다. 살 것 같았다.”
왕스샹은 가출했다. 허난(河南)·산시(陝西) 일대를 떠돌았다. 린후이인(林徽音), 량스청(梁思成) 부부와 함께 각지에 흩어져 있던 고건축물의 실태를 조사하며 고증을 통한 고대건축의 연구에 매달렸다. 이류당이 있는 충칭(重慶)까지 흘러 들어갔지만 이류당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는 없었다.

왕스샹의 집 팡자위안(芳嘉園)은 베이징의 대표적인 전통가옥이었다. 우쭈광의 집에서 이류당 사람들과 알게 된 왕은 황먀오쯔, 위펑 부부, 만화가 장광위(張光宇)에게 팡자위안으로 이사올 것을 권했다. 문화부 부부장 샤옌(夏衍)과 딩충의 집도 지척에 있었다. 샤는 이들의 대장이었다. 팡자위안은 신이류당의 새로운 집결지로 탄생했다.
왕스샹은 음식의 대가였다. 남의 집에 가서도 음식을 직접 만들었다. 그가 만든 국수와 야채요리는 천하의 별미였다. 비결을 물으면 “좋은 자료를 고를 줄 아는 눈만 있으면 된다. 가급적이면 남보다 먼저 시장에 가라”는 말을 자주 했다. 왕은 새벽마다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왕스샹은 중국인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던 중국인 중 한 사람이었다. 5개월 전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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