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송수권 '적막한 바닷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종이 울리는 것은

제 몸을 때려가면서까지 울리는 것은

가 닿고 싶은 곳이 있기 때문이다

둥근 소리의 몸을 굴려

조금이라도 더 멀리 가려는 것은

이목구비를 모두 잃고도

나팔꽃 같은 귀를 열어 맞아주는

그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앞선 소리의 생이 다하려 하면

뒤를 따라온 소리가 밀어주며

조용히 가 닿는 그곳

커다란 소리의 몸이 구르고 굴러

맑은 이슬 한 방울로 맺히는 그곳.

- 정일근(1958~ ) '종'

맑은 시다. 멀리 퍼지는 종소리를 '둥근 소리의 몸을 굴려' 내는 소리라고 표현한 부분이 참 재미있다. 소리가 몸을 얻어 살아있는 생명체로 숨을 쉰다.

소리가 둥글다는 인식은 시적 화자가 갈등을 넘어 화해를 소망하고 있다는 뜻이다. 소리가 소리를 밀어준다는 표현도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마지막 행의 '이슬' 을 슬쩍 '피' 로 바꾸어 읽어보자.

어떤 느낌이 드는가. 좀더 짠해지지 않겠는가. '이슬' 이 알맞은 마침표라면, '피' 는 좀더 오래 구르는 말줄임표가 아니겠는가. 어떤 말을 선택하는가의 문제조차 시인의 운명이다.

안도현 <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