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분단시대의 국가 정체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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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국가 정체성'이라는 어려운 단어가 요즘 사람들의 입에 심심찮게 오르내린다. 그것을 굳게 지켜내겠다는 결연한 목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우리가 지켜내야 할 그것을 규정하는 일이 정말 간단치 않다는 것이 문제다.

한 개인의 경우에도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등으로 확인되는 '신원(身元)'의 차원을 넘어 그가 과연 어떤 인물인지 그 '정체(正體)'를 따질라치면 문제가 한없이 복잡해진다. 하물며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장구한 세월을 이어가는 국가의 경우에랴. 요즘은 도대체 국가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 자체가 학계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난다는 주장마저 강력하다.

*** 헌법과 현실의 간격 심한 편

입헌국가의 경우 대체로 그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차적 문건은 헌법이다. 그러나 헌법에 멋진 규정들이 있다 해도 그런 정체성을 실제로 확립하기는 쉽지 않은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현실과의 간격이 특히 심한 편이다.

예컨대 우리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해서 통일국가의 정체성을 선포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실질적 통치권은 이 영토의 절반에 한정될 뿐만 아니라 이 헌법의 제정을 주도한 것이 바로 이처럼 한정된 통치권의 확보, 즉 단독정부 수립을 서두른 세력이었다. 그 결과 제3조 자체도 통일국가 정체성 만들기를 돕기보다는 남북 대결을 부추기는 데 이용되기 일쑤였다.

더구나 분단과 남북대결의 과정에서 지난날 대일본제국의 국가 정체성을 곧 자신들의 국가 정체성으로 받아들였던 세력이 통치에 대거 참여했고, 국민의 지지를 못 받다 보니 밖으로 외국에 굴종하고 안으로 독재정치를 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히 헌법 제1조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거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규정조차 지켜지기 힘들었다.

이처럼 우리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은 국가 정체성 문제를 간단히 말할 수 없게 만든다. 가령 일본의 식민지로 살던 당시에도 국가기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대표하는 국가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식민지 종주국의 정체성이며 우리는 그것과 별개의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만들어갈 과제를 안고 있다는 복합적인 인식이 필요했다.

식민지시대가 분단시대로 이어지면서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만들어갈 최소한의 여건은 마련되었지만 민족 구성원 대다수가 꿈꾸던 통일된 독립국가로서의 정체성에는 원천적인 흠집이 생긴 것이다. 그 결과 한편으로는 분단국가도 국가인 이상 그것 나름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 이 온전치 못한 정체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더 온전한 정체성으로 바꿔나갈 길은 무엇이냐는 질문이 항상 따라다니게 되었다. 이것이 분단시대 우리 모두의 짐이자 남다른 도전이다.

이렇게 볼 때 분단시대의 국가기구가 헌법 제1조를 외면하며 제3조를 오용 또는 악용해온 갖가지 제도와 관행을 고수하는 일이 진정한 국가 정체성 수호와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가 뚜렷해진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정체를 더욱 아리송하게 만들고 국민통합의 길을 가로막을 따름이다.

반면에 대한민국이 분단국가로 출발했고 친일세력 청산이 안 되었으며 독재와 외세 의존으로 얼룩진 역사를 가졌다 해서 마치 식민지시대의 연장인 것처럼 그 정체성을 부정하는 태도 또한 현실에 안 맞기는 마찬가지다. 분단국가에도 그 나름의 정체성은 있는 것이며, 더구나 우리는 분단체제의 질곡 속에서도 나라살림을 키우고 민주화를 진전시키며 남북의 교류와 협력을 시작함으로써 한반도에 분단체제보다 나은 체제를 건설할 전망을 갖게 되지 않았는가.

*** 현명한 중도주의 필요한 시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인정하면서 그 진보적 변화를 주장하는 경우에도 분단시대의 특이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분단 없는 사회의 잣대로 진보와 보수를 재단하는 것은 도리어 분단체제 극복에 역행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 구호로서의 상생이 아니라, 분단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일단은 분단체제를 넘어서기 위해 힘을 모으자는 뜻에서 상생이 필요하고 현명한 중도주의가 요구되는 시대가 분단시대인 것이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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