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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익의 인물오디세이] 헤이리 아트밸리 김언호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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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과천 외곽에 복숭아 농장이 있다. 그 농원 주인의 수입원은 복숭아 수확이 아니다. 이른바 보신탕을 파는 것이다. 복사꽃이 흐드러진, 혹은 복숭아가 익어가는 나무 아래 평상에서 보신탕을 먹는다□ 식도락을 탓할 것은 아니로되 퇴폐적 탐미, 엽기 취미의 스릴이 느껴진다.

그 집의 성업은 음식의 맛은 둘째치고 복숭아 농장의 연출력에 힘입고 있다. 보신탕 애호가에겐 무릉도원이 따로 없는 것이다.

장흥, 일영 혹은 의왕의 백운, 수원의 원천호수 주변은 과천 복숭아 농장의 거대한 확대판이다. 그곳에는 보신탕집을 포함해 술집과 음식점.러브호텔이 아름다웠던 계곡과 하천.호숫가를 뒤덮고 있다. 만일 그것들 대신 그곳에 미술관.음악관.박물관 등이 들어섰다면 그곳이 바로 문화의 무릉도원일 것이다.

'가든' 이니 '파크' 니 '러브' 니 하는 언어 모독의 범람 속에서 문화예술 마을 '헤이리' 건설을 위한 토목공사가 다음달 중순 착공된다. 1997년 발기모임이 구성된 지 4년 만이다. '헤이리' 는 파주의 통일동산 안에 있다.

서북류(西北流)의 한강을 따라 달리는 자유로가 분단의 벽 앞에서 발을 멈추기 조금 전의 곳이다. 15만5천평 규모의 단지 안에는 작은 산과 나무들, 작은 내와 갈대밭, 굴곡진 언덕이 있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온전히 그대로 두고 마을을 조성할 예정이다.

구상대로 실현되면 2003년 봄부터 '헤이리' 는 문화의 개방형 무릉도원이 될 것이다. 상상해 보라. 박물관만 치더라도 종(鐘), 차(茶)주전자, 외국에서 펴낸 한국 관련 도서, 시조, 악기, 과학도구, 영화, 궁중음식, 유라시아 유물, 우리꽃 박물관 등이 한곳에 모여 있다! 헤이리에는 3백명 가량의 문화예술을 창작.유통.감상하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곳은 문화예술계 프로들의 일상을 집합시켜 이를 남들과 공유케 하는 철학의 도량(道場)을 지향한다. 가령 출판인 김언호씨는 '책의 정원' 을 조성하고, 조각가 최만린씨는 개인 전시장을 설치하며, 화가 임옥상씨는 단지 내 야산을 미술관 개념으로 꾸민다.

또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방송인 황인용씨는 음악홀을 운영할 계획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과 함께 할 시민들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다.

'헤이리 이사회' 이사장 김언호(한길사 대표)씨는 첫삽을 곧 뜨는 감회에 다소 흥분한 듯했다. 헤이리 프로젝트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 백일몽 같은 계획이 실현의 서막을 여는 것이다. 기자가 미처 물을 새도 없이 그가 장황하게 '헤이리 문화운동' 에 대해 열변을 토했기 때문에 질문 중 몇개는 부득이 만들어 넣었다. 金씨의 대답은 물론 열변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헤이리에 관한 구상은 金씨가 파주에 조성 중인 출판단지(이사장 이기웅) 운영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영국의 산간마을인 '헤이 온 와이' 를 들른 게 시작이었다. 인구 1천5백명인 헤이 온 와이에는 37개의 특색있는 서점이 들어차 '책의 왕국' 이라 불리는 관광명소다. '헤이리' 란 명칭은 파주의 전래 농요의 후렴구에서 따왔다.

- 회원 중 많은 사람이 그곳에서 거주하기 때문에 언뜻 문화 귀족촌 같은 인상을 준다. 문화소비 대중과는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오히려 문화 귀족촌의 반대 개념이다. 문화예술의 창작과 유통을 투명하게 공개해 사상과 예술의 대중시장이 되는 게 헤이리다. 우리는 나를 비움으로써 전체를 채우는 새로운 공동체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는 확신에서 시작했다. "

- 헤이리에서 나와 전체의 관계를 지배하는 방식이 무엇인가.

"기존의 담으로 상징되는 개인별 닫힌 삶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미술관을 지어도 마을 전체의 개념에 따라 지어야 한다. 나무 한 그루도 전체의 합의아래 베어야 한다. 마을 조성과 운영의 지침을 미리 정하고 그것이 전체를 지배하는 속에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식이다. "

- 너나할것없이 남의 딴지를 거는 데 능숙한데 그런 공동체가 가능한가.

"그러지 말자는 데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이 모였다. 한 동네에 모여 살며 고담준론을 일상화하고 그 담론의 결과를 각자의 작업으로 일반에 공개하자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술.철학을 통한 문화적.도덕적 발진기지의 기능을 기대하고 있다. "

- 일반 공개는 문화의 쇼핑몰 같은 개념인가.

"선진 외국에 가보면 역사와 전통을 생각케 하고 실천으로 유도하는 인문적 시설이 잘 발달돼 있다. 그것도 조직적인 비즈니스 마인드로 운용한다. 우리도 그것을 해보자는 것이다.

헤이리는 사적 시설이지만 문화예술에 관한 체험을 생산.소비 양쪽에서 공유해 지적.문화적 연찬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개념이다. 그런 교육과 감상의 마인드를 마을로 집단화하고 영구화하는 곳이 헤이리다. 파편화된 각개약진적인 방식으로는 문화운동의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

헤이리는 전체 15만5천평 중 5만평 가량은 지금 있는 대로 둔다. 옛 사찰들이 그렇듯 사람과 집과 자연이 같이 가는 것이다. 자연과 어우러지지 않는 집은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또 눈에 잘 띄는 식의 간판은 붙이지 않을 예정이다.

고래고래 악을 쓰는 지금 거리의 간판들은 간판이 사람을 지배하는 몰인간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외 41명의 건축가가 참여해 건축 가이드라인을 정해놓고 각자의 기량을 뽐내게 된다.

- 외국의 문화마을과도 차별성이 느껴진다. 말하자면 '헤이 온 와이' 를 종합세트처럼 꾸미는 것인가.

"회원들은 모두 각 방면의 전문가다. 미적 통일과 합의를 이끌어가는 그동안의 방식만 갖고도 수십권의 연구서를 낼 만하다. 그들과 함께 열차례 외국의 유명 문화마을을 답사했다.

스페인의 빌바오 같은 곳은 낙후된 철강도시가 구겐하임미술관 하나로 완전히 리노베이션된 것을 봤다. 미술관 하나 때문에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문화의 세기가 뭔가를 새삼 절감했다. 헤이리는 헤이 온 와이나 빌바오의 메뉴를 문화 전방위로 확대하는 것이다. 문화예술을 통한 국부 창출을 기대하는 것도 그같은 까닭이다. "

마을이 완성되면 스펙터클도 대단할 것 같다. 들어설 박물관의 예를 앞서 들었지만 예컨대 회원 중 1백명 가까운 미술가가 작업하는 모습 자체가 장관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나중에 '헤이리 파운데이션' 도 설립할 계획이다.

구상하는 미술 비엔날레, 도서 박람회, 영화제, 사상 강연회, 각종 이벤트 등 집체적인 행사를 효과적으로 치러내려는 목적이다. 거기다 관람객 또는 문화 쇼핑객이 폭주할 경우 그들을 효과적으로 민족시킬 과학적인 프로그래밍이 필요한 것도 이유다. 김씨는 헤이리가 기대대로 운영되면 연간 수백만명이 찾아올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컨설팅회사가 그렇게 진단했다고 한다.

- 너무 자신만만한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네덜란드에 가서 이런 방면의 전문가와 의견을 나눴더니 우선 입지조건에 놀라더라. 서울 시내에서 한 시간, 인천국제공항에서 한 시간 거리에 위치한 것은 천혜와 같다 하더라.

오히려 밀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헤이리 주위가 난개발되는 것을 어떻게 하면 막을까 고심 중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곳을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뻗어가는 문화적 신(新)실크로드의 출발지로 만들 것이다. 국내인에게는 문화의 교육장으로, 외국인에게는 한국을 다시 찾게 하는 명소로 키워간다면 그런 목표가 결코 꿈이 아니다. "

이헌익〔문화.스포츠 에디터〕

사진=최정동 기자

<헤이리가 걸어온 길>

▶1997년 3월 : 서화촌 준비위 발족. 김언호 한길사 대표 위원장 선임

▶1998년 2월 : 서화촌 건설위 창립총회

▶7월 : 토지공사와 부지 3만평 계약체결

▶10월 : 단지 지명 공모 헤이리 아트밸리로 결정

▶1999년 12월 : 재미화가 강익중씨 헤이리 현장서 '10만의 꿈' 프로젝트 개막식 타운부지 15만평 계약

▶2000년 1월 : 필지 배정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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