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등 떠밀려서라도 … 변화는 시작이 중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한 금융지주사 임원의 푸념이다. 올 1월 전국은행연합회가 내놓은 사외이사 모범규준에 대해서다. 모범규준 내용이 워낙 구체적이고 까다롭다는 불만도 쏟아냈다. 다른 지주사들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나온다.

“모범규준대로 하면 관료 출신과 교수를 빼고는 사외이사를 할 만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말 많던 모범규준이 이번 주주총회 시즌부터 각 은행과 금융지주사에 적용되고 있다. 일단 주요 금융지주사와 은행들은 모범규준 내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불만불평이야 여전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눈에 모범규준은 ‘안 따르면 큰일 나는’ 강제규준이다.

물론 만들기는 은행연합회가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론 금융감독 당국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금융사들이 모범규준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을 터다.

이로 인한 변화 폭은 적지 않다. 전문경영인이 지켜왔던 이사회 의장 자리가 사외이사로 넘어온 게 가장 큰일이다. 신한금융지주와 하나은행은 각각 회장과 은행장이 맡고 있던 이사회 의장 자리를 사외이사에게 넘겼다. 26일 주총을 여는 하나금융지주는 김승유 회장이 이사회 의장직을 내놓을 전망이다.

사외이사도 대폭 물갈이된다. 이번 은행권 사외이사 중 30%가량이 물갈이된다. 자격 요건에 못 미치거나, 5년 임기를 넘긴 사외이사들이 대상이다. 1997년 사외이사제도가 은행권에 본격 도입된 이래 가장 큰 변화다.

이런 변화를 갑자기, 그것도 떠밀려 시도하자니 금융지주사나 은행들로서는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스스로 자초한 바가 크다.

무엇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사외이사제도의 부작용이 그대로 방치됐던 탓이다. 한쪽에선 사외이사가 제 목소리를 못 내는 거수기라는 비판을 들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에선 사외이사가 권력화돼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금융사에 따라 극단적인 차이를 보인 것이다. 나중에 감독당국이 들춰보니 사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사외이사도 있었다.

이를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다. 지난해 초 KB금융 이사회는 국민은행과 거래관계가 드러나 문제가 됐는데도 해당 사외이사의 연임을 결정했다. 스스로 고쳐보려 하지도 않았다. 신동규 은행연합회장의 말처럼 은행들이 잘해왔으면 모범규준까지 나올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수수방관하다 문제가 불거지자 뒤늦게 나선 금융당국의 책임도 적지 않다.

어쨌든 떠밀려서라도 은행권은 사외이사 제도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물론 새 변화가 100%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계속 불만만 내뱉기보다는 일단 해보고 문제가 있으면 그때 고쳐달라고 하는 게 순리다.

한애란 경제부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