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일기] 고이즈미식 역사 왜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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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8월 15일 야스쿠니(靖國)신사 공식 참배' 논쟁을 지켜보면서 그 이면에 숨은 일본 정치인들의 역사왜곡 논리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도쿄(東京) 중심가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제2차 세계대전 전몰자들의 위패가 안치된 곳으로 황국주의의 본산이자 우익사상.군국주의의 상징이다. 한국.중국에서는 이 때문에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공식참배는 황국사상을 인정하는 행위라고 여긴다.

그럼에도 고이즈미 총리는 "오늘날 번영의 기반이 된 전몰자들의 숭고한 희생에 마음으로부터 감사드리기 위해 참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는 논리를 펴고 있다. 한국.중국.대만 등 아시아의 많은 나라 국민은 일제에 식민지 지배를 당하거나 전쟁 피해를 보았다.

일본 탄광 등에 끌려와 무임금으로 강제노역을 당한 한국인들이 지금도 법적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일제가 당시 수탈한 재산이 일본의 경제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것은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고이즈미의 말은 한마디로 역사왜곡이다.

고이즈미식 역사왜곡이 일본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은 의외로 크다. 일본인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우리가 국립묘지에 가는 정도로 생각한다. 최근 우익단체의 중학교 역사교과서 왜곡문제가 등장했지만 빙산의 일각일 뿐 일본 지도층의 역사왜곡은 생각보다 광범위하고 심각하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한국.중국은 대체로 총리 자격의 공식참배는 거세게 반발하면서도 개인적 참배는 묵인해 왔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가 1985년 총리 자격으로 참배했을 때 한국.중국은 격렬하게 항의했으며 그는 다음해 참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가 총리 시절인 96년 7월 신사를 참배한 뒤 "개인 자격으로 갔다" 고 변명하자 주변국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고이즈미의 참배 문제에 대한 한국.중국의 반응도 형식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진짜 심각한 문제는 참배의 형식이 아니라 참배의 이유다.

오대영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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