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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10만원권 왜 필요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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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우리나라가 만원권 지폐 대신에 9천원권 지폐를 사용한다면 얼마나 불편할까. 사실 9천원권 지폐의 발행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지폐액면가를 쓰는 나라가 있다.

***정치문제로 경제에 족쇄

미얀마(옛 버마)의 화폐단위 이름은 차트(kyat)다. 그 나라 방문시 환전을 위해 얼마의 달러를 주고 1천차트를 받았다. 이 때 조그마한 10차트짜리 한 장으로 몇 장의 큰 돈을 옆으로 묶은 한 다발의 돈을 받았다.

놀라웠던 것은 그 큰 돈 다발이 90차트짜리 열한장으로 이뤄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9십차트짜리 열 한장이니 9백90차트가 되고 여기에다 10차트짜리 한 장을 붙여 1천차트 다발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 나라에는 50차트짜리는 없고 45차트짜리가 있다는 사실도 후에 알게 되었다.

일주일이 못되는 짧은 일정 동안 여러 차례의 돈 거래를 통해 필자는 적지 않은 불편을 겪었다. 한동안 동남아의 일등국가였던 미얀마가 이제는 가장 낙후한 경제를 지니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를 발견한 느낌이었다.

공식적으로 결코 확인될 수 없는 사실이겠지만 그 나라가 그런 지폐의 액면가를 가지게 된 이유가 바로 최고 정치권력자가 소위 가보(9)라는 숫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곳에 오래 거주한 한 한국인을 통해 알게 됐다. 잘못된 정치가 경제를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좋은 예를 보는 듯했다.

적절한 지폐가 발행되지 않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선진국도 있다. 최근 미국 경제가 다소 침체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많은 경제전문가들은 유럽연합(EU)의 화폐인 유로화가 달러화에 비해 강세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해 왔다.

미국이 이자율을 수 차례에 걸쳐 내렸으니 달러화에 비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EU의 유로화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유로화의 상대적 가치가 강세를 보이리라는 것은 당연한 예측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측은 빗나갔다.

미국의 경제가 나아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도 유로화는 달러화에 비해 강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바로 유로화가 아직 가상(假想)의 화폐일 뿐 지금까지 지폐로 발행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적 거래에서 유로화가 아직 사용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유로화에 대해 불확실성을 느끼게 되고 따라서 유로화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EU가 정치적으로 아직 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화폐제도에 대한 신뢰성이 결여되고 경제적 비효율성이 야기되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도 똑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만원권 지폐가 발행된 지 30년이 지났다. 그 동안 물가상승으로 화폐의 구매력은 10분의 1로 떨어졌고 금융거래 규모는 1백배 이상으로 확대됐다. 따라서 30년 전보다 1천배 이상 되는 만원권이 발행돼야 하고 또 우리는 더욱 많은 돈을 갖고 다녀야 한다.

우리가 겪는 불편이란 말할 필요도 없다. 지금 10만원권 자기앞 수표가 마치 지폐처럼 쓰이고 있다. 그러나 자기앞 수표는 지폐보다 발행비용.관리비용.보관비용이 훨씬 더 들 뿐 아니라 위조 가능성이 크다.

***검은돈 차단 法제정 급해

즉, 자기앞 수표는 지폐와는 달리 계속적으로 회전될 수 없어 새로운 수표를 지속적으로 발행해야 하며, 결제할 때마다 추심을 해야 하는 등 행정비용이 소요되고, 결제가 이뤄진 후에도 일정기간 은행에 보관해야 하는 등 많은 비용을 야기한다.

한 전문가의 계산에 의하면 10만원권 지폐를 발행할 경우 10만원권 자기앞 수표를 사용할 때보다 1조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한다.

10만원권 지폐 발행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화폐단위가 클수록 부정한 돈 거래가 쉬워지고 거래내용을 추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깨끗한 정치가 아직 담보되지 못한 우리 실정에서 일면 일리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민주화가 돼가는 이때에 자금세탁방지법.부패방지법 등을 조속히 제정해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확보한다면 이 문제는 어느 정도 풀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잘못된 정치문제에 의해 경제에 족쇄를 채우는 일을 없애는 것이 바로 올바른 개혁방향이다.

이영선 <연세대 교수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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