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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시평] 북한 인문사회학의 기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평양은 우리 인민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 슬기와 재능을 자랑하는 력사의 도시입니다. ' 평양은 인류력사의 려명기로부터 사람들이 련면히 살아 오면서 문화의 씨앗을 뿌리고 꽃 피워 온 유구한 력사와 우수한 문화전통을 가진 력사의 도시이다. "

***논문인가 선전문건인가

지난 4월 초 런던에서 열렸던 유럽한국학회에서 북한학자가 발표한 '최근 평양일대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 이라는 논문의 서두이다.

발표자는 최근 발굴된 구석기시대의 몰이사냥터와 신인(新人)의 뼈화석, 신석기시대의 순장무덤, 그리고 단군조선시기의 성곽, 부락터, 제단유적, 고인돌무덤 등의 흥미진진한 유적들의 연대와 그 유적들에서 유추할 수 있는 선사시대 평양지역의 생활상과 문화수준에 대해 소개하고, "우리는 앞으로도 력사유적유물에 대한 조사발굴과 연구사업을 더욱 힘 있게 벌려 나감으로써 내 나라, 내 조국의 유구한 력사와 우수한 문화전통을 만방에 자랑 떨치도록 하는데 적극 기여하도록 하여야 할것이다" 로 결론을 맺었다.

두 번째 발표는 일제강점기의 항일문학이 얼마나 '원수들' '놈들' 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찬 애국적인 문학이었는가 하는 것이고 세 번째 발표는 실학사상가들이 얼마나 애국애족의 열정에 불탔던 사람들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번 유럽한국학회에서 북한학자들이 발표한 세편의 논문은 모두 위대한 영도자나 수령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돼 애국적인 결의의 표명으로 끝을 맺었다.

항일문학과 실학에 대한 발표는 북한에서 미 제국주의 규탄문학과 계급투쟁문학에 밀려 다분히 등한시되던 항일문학과 북한 사학계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했던 실학이 새로이 조명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어서 흥미로웠다. 동시에 북한에서는 인문학에서 문학작품이나 사상의 평가기준이 그 '애국성' 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실, 실학에 대한 발표는 실학자들이 사대주의.모화사상을 배격하고 민족자주의식을 일깨우려 했다는 내용인데, 모두(冒頭)에 김일성의 애국적 발언을 앞세우고, 중간중간에 실학사상이 애국적인 사상임을 거듭 강조하고, (실학자들의) "애국, 애족의 전통을 이어 조국통일의 성스러운 위업에 손 잡고 나아 갈것을 기대합니다" 로 끝맺음으로써 완전히 국가선전문건 같이 돼버렸다.

유럽한국학회는 북한측의 참가자체에 큰 의미를 두기 때문에 이렇게 학문적 엄격성이 결여된 선전문 같은 논문에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이런 논문이 야유를 받지 않고 수용되는 국제학회는 한국학회 말고는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이 발표들을 들으면서 앞으로 북한이 세계의 학문적 무대에 진출하게 될 때 겪지 않을 수 없을 진통을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웠다.

오늘날 세계의 학계는 '애국심' 이나 '증오' 가 얼마나 강렬한가 같은 것을 문학이나 사상의 평가기준으로 삼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증오심이 어떻게 문학적.예술적으로 감동적이고 효과적으로 표현됐는가를 논하는 논문조차 이제는 너무 구식 논문이고, 요즈음은 최근에 현란하게 발전한 새로운 비평적.사상적 패러다임에 비춰 작품이나 저서의 의미나 기호체계를 구조적으로 분석해야 학술논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인식격차 좁히기 노력을

고고학의 경우도 아마 "신인단계의 화석들에서 현대조선사람에게 이어 지는 특징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역이 인류의 축자적인 진화발전과정이 이루어진 지역인 동시에 조선사람이 생겨 난 본 고장이라는 것을 말하여 주는것이다" 같은 자축(自祝)적인 주장은 학문적인 인정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항일문학에 관한 논문의 발표자는 반일애국문학의 계급적 한계에 대해 질문을 받고 항일문학을 "계승해야 할 혁명전통으로는 보지 않는다" 고 답변했다. 실학에 관한 논문의 발표자는 "북한에서 언제부터 실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느냐?" 는 질문에 "위대한 령도자께서 1986년(?) 실학을 애국적인 학문이라고 말씀하신 이래 실학이 애국적 학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고 답변했다. 우리는 자유로운 남북교류와 통일의 날에 대비해 모든 분야에서 북한과의 크나 큰 인식의 격차에 대해 차분하고 굳센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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