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

칼을 든 혁명투사에서 청진기 든 의사가 된 서재필

중앙선데이

입력 2010.03.22 10:09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서재필기념관 앞의 표지판.

필라델피아 인근 미디어에 있는 서재필기념관 입구에는 펜실베이니아 역사박물관 위원회가 세운 표지판(사진)이 있다. 거기에는 ‘서재필이 한국 민주화의 씨를 뿌렸으며 한국 최초의 서양의사’라고 씌어 있다.

서재필은 백면서생 같은 외모와 달리 젊을 때 칼을 든 혁명투사였다. 1882년 18세 때 과거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했지만 이듬해 먼 친척인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 군관학교에서 1년간 유학하고 돌아왔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홍영식·박영효와 함께 청나라 종속외교에 반대하며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서재필은 칼을 빼들고 군사를 지휘하고 국왕을 호위하는 행동전위대를 맡았다. 그 공으로 병조참판이 됐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천하’에 그쳤다. 서재필은 대역죄인이 됐다. 부모와 형, 부인은 음독 자살하고 동생들은 참형을 당했다. 두 살배기 아들은 돌보는 사람이 없어 굶어 죽었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막노동을 하면서 주일에는 교회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는 해리 힐맨 아카데미(고교)에서 공부한 뒤 컬럼비안 의과대학(현재 조지워싱턴대학) 야간부에 입학해 1892년(28세) 한국 최초의 서양의사가 됐다. 혁명의 칼을 휘두르던 젊은이가 흰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든 의사로 변신한 것이다.

그 무렵 서재필의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긴다. 1894년 워싱턴에서 의사 개업 뒤 제임스 뷰캐넌(제15대 미국 대통령)의 조카딸 뮈리엘 암스트롱을 만나 결혼한 것이다. 서재필기념재단을 운영하는 의사 출신의 정환순 선생은 “두 분의 결혼은 워싱턴 포스트 등이 보도할 만큼 큰 화젯거리였는데 지금도 많은 사람이 로맨스 내용을 궁금해한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슬하에 두 딸을 두었다. 화가인 둘째 딸 뮈리엘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부친을 곁에서 도왔다. 큰딸 스테파니는 미국인과 결혼했다.

갑오경장 뒤 역적죄가 사면되자 서재필은 1895년 12월 귀국해 중추원 고문관이 됐다. 배재학당에서 강의하는 그를 만나 이승만·주시경은 서양과 신학문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그는 1896년 4월 민중의 각성과 지지 없이 나라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이에 부담을 느낀 정부는 1898년 5월 중추원 고문관직을 박탈하고 그를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1947년 미 군정청을 이끈 하지 장군은 서재필을 남조선 과도정부 특별의정관으로 초빙했다. 둘째 딸과 함께 귀국한 그는 이승만·김규식·여운형·안재홍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다. 매주 금요일이면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이념·제도를 전파했다. 48년 이승만을 만나 5·10 총선에 불참한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파를 포용할 것을 권유했지만 자신이 정치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사양했다. 많은 사람의 대선 출마 권유를 뿌리친 채 그는 48년 9월 미국으로 돌아와 다시 의료활동에 전념했다.

서재필에겐 일가친척이 거의 없다. 형 재춘의 종증손자로 로스앤젤레스에서 변호사로 일하는 서동성이 유일한 혈육이다. 2008년 5월 워싱턴 한복판에 있는 한국 총영사관 건물 앞에 서재필 동상이 건립됐다. 그곳에 참배하는 한국인들을 보면서 서재필의 영혼은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필라델피아=고재방 하버드대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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