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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텅 빈 충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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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방향을 바꾼다면,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서로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진흙탕 싸움의 무명세계(無明世界)에서 스님은 ‘비어있으나 충만한’ 무소유의 삶으로 마음의 평화를 소유했다. 봄꽃처럼 소담하고 질항아리처럼 담박했던 스님의 무소유에서 단지 ‘소유의 없음’이라는 부정의 뜻만을 건져 올리기에는 그분이 남긴 삶과 죽음의 무게가 너무도 둔중하다. 주제넘지만, 그 부정을 뛰어넘어 ‘무(無)를 소유한 무소유’라는 낯설고 새로운 긍정, 그 ‘텅 빈 충만’의 모순을 조심스럽게 더듬어본다.

‘무’가 무엇이던가?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라는 물음에 조주선사는 ‘무’라고 대답했다. 조주의 무자화두는 『무문관(無門關)』 (중국 남송의 선승 무문혜개의 공안 모음집) 제1칙이 ‘오직 이 하나의 무자(只者一箇無字)’라고 했을 만큼 의미심장한 궁극의 본참공안(本參公案)으로 전해진다. 그 조주에게 제자가 물었다. “가져온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찌해야 합니까?” 스승이 답한다. “내려놓아라(放下着).”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란 말입니까?” “그럼 짊어지고 가거라(擔取去).” 다른 제자가 말했다. “제 마음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습니다.” 조주가 일갈한다. “굉장한 것을 걸치고 있구나!” 모두 버렸다는 생각,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았다는 생각 자체가 이미 많은 것을 지니고 있음을 뜻한다. 화두의 깊은 뜻을 알 턱이 없는 속인의 눈으로도 아직 ‘무’에 이르지 못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겠다.

『무소유』 『텅 빈 충만』 『오두막편지』 등 수많은 스테디셀러를 쓴 법정 스님은 상당한 액수의 인세를 가난한 이들에게 소리 없이 나눠주고는 그 일을 깨끗이 잊었다고 한다. 남을 도왔다는 생각마저도 놓아버린 스님의 무소유는 일체의 분별심을 깨뜨리는 저 궁극의 본참공안 ‘무’를 소유한 무소유, 그 ‘텅 빈 충만’의 자리가 아닐까? 8만4000의 법문을 설파한 부처가 “나는 한마디도 설법한 일이 없다”고 말했듯이, 근본에 이르는 길과 방편은 말글에 담을 수 있어도 근본 그 자체는 불립문자(不立文字)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도저히 필설로 나타낼 수 없을 터인즉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도록 내 책들을 모두 절판해 달라”는 스님의 유언이야말로 그대로 부처의 마음이자 ‘무’의 경지일 것이다. 절판에 따르는 복잡한 법률적·경제적 이해관계는 남은 이들의 몫이다.

말사의 주지 한 자리도 지낸 적 없고 자신이 세운 절에서조차 머무른 일이 없었던 스님은 스스로 몸담고 있는 불교계의 현실을 몹시 마음 아파했다. “자칭 견성(見性)했다는 사람들은 많아도 그 영향이 산문이나 자기 집 담장 안에서만 통용되고 있다면 그건 대개가 사이비다. 뭘 알았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치고 온전한 사람은 없다.”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유행처럼 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어찌 불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랴? 산상수훈의 설교들은 넘치도록 쏟아내면서도 산상수훈의 삶은 좀처럼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이 시대의 종교인들이 뼈아프게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소유를 범죄처럼 생각했던 간디에게 깊이 공감한 법정 스님은 관도, 수의도 없이 평소에 입던 가사 그대로 걸치고 좁은 평상에 누운 채로 다비(茶毘)의 불길에 들어갔다. 그 흔한 꽃도, 만장도, 추모사도, 임종게(臨終偈)도, 아무것도 없었다. ‘없는 것’들이 그토록 많이 ‘있었다!’ 무소유의 끝자리는 말 그대로 ‘텅 빈 충만’이었다. 마지막 길을 모신 호사스러운 캐딜락만이 그 충만을 약간 시샘(?)했을 따름이다.

“빈 마음이 우리의 본마음이다. 마음을 텅 비우고 있어야 거기 울림이 있다. 울림이 있어야 삶이 신선하고 활기 있는 것이다.” 빈 마음, 무소유의 삶으로 궁극의 ‘무’를 소유했던 법정 스님은 종내 그것마저 훌훌 놓아버리고 스스로 ‘무’가 되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스님이 남긴 무소유, 그 텅 빈 충만은 신선하고 활기 있는 큰 울림으로 늘 우리 곁에 남아있을 것이다.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전 서울중앙지방법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