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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인터뷰] 미군 3대 ‘제2조국’ 코리아 지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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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캐서린 버바 미군 대령이 태극기·성조기 앞에서 거수 경례를 하고 있다. 버바 대령은 현재 경북 왜관의 주한미군 501 지원여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미국의 군인 집안 버바(Burba)가(家)에 한국은 제2의 고국이나 다름없다. 3대가 한국에 복무하며 연을 맺었다. 6·25전쟁 당시 한국을 지켰고 북한의 추가 도발을 막으면서 한·미동맹을 반석에 올려놓는 데 한몫했다. 경북 왜관의 주한미군 501 지원여단장으로 2000여 명을 통솔하는 캐서린 버바(45·여) 대령이 그 3대다. 그의 한국 근무는 이번이 세 번째다. 모두 자원했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다.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그의 할아버지 에드윈 H 버바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서 막바지인 53년까지 제3보병사단의 참모장으로 참전했다. 64~66년에는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장으로 한국땅을 두 번 밟았다. 한국 방어에 대한 그의 공헌은 가늠키 어려울 정도다. 아버지 에드윈 H 버바 주니어(74)는 88~89년 육군 중장으로 한미연합야전군(CFA) 사령관으로 근무했다. CFA는 중부전선 방어를 맡은 세계 유일의 야전군 연합부대로 92년 해체됐다. 그는 대장으로 예편했다. 그의 세 딸 중 둘째가 캐서린이다. 6월 아프가니스탄 전보를 앞둔 그를 17일 주한미군 용산기지에서 만났다. 아버지와 우정이 깊은 백선엽 장군을 만나고 공무를 처리하기 위해 용산을 찾은 그는 “한국은 내게 고향과 같다”며 “언젠가는 한국에 꼭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언제부터 군인의 꿈을 키웠나.

“5살 때 아버지가 낙하산 훈련 하는 걸 구경하면서 어머니에게 ‘어른이 되면 저렇게 재미있는 거 할래요’라고 했다고 들었다. 어머니는 웃어넘기셨다. 당시(70년) 여군은 가뭄에 콩 나듯 있던 시절이다. 어머니는 나를 군인의 아내로 키우려고 손님 접대 예절이며 사교 방법을 가르쳤다. 하지만 10대에도 군에 대한 동경은 계속됐다. 콜로라도주립대(정치학 전공)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ROTC에 자원했다. 아버지의 격려가 큰 힘이 됐다. 해보니 딱 내 적성에 맞았다. 87년 임관식엔 아버지도 참석해 의미가 더 컸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캐서린 버바 대령의 할아버지 에드윈 H 버바(오른쪽)와 부인 마거릿 버바.

-장군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영향도 많이 받았을 텐데.

“우린 대대로 군인 집안이다. 친가는 육군, 외가는 해군이다. 삼촌은 군의관이었고 여동생은 공군 조종사와 결혼했다. 나도 입대 후 군대 문화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

-3대에 걸쳐 한국과 인연이 깊다.

“할아버지는 제3보병사단 참모장으로 6·25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작전계획을 세우고 조율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이던 70년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셨지만 할머니를 통해 한국에 대해 많은 걸 배우게 됐다. 할머니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집의 대부분을 한국의 고가구와 한국 전통 예술품으로 꾸몄을 정도였다. 한국의 물고기 모양 자물쇠로 잠그는 서랍장에 사탕을 넣어두곤 하셨는데, 어렸을 때 그걸 여느라 애를 먹곤 했다. 할머니는 특히 고아원에서 봉사하는 걸 좋아했고, 그 영향으로 삼촌은 한국 아이 셋을 입양했다. 그중 한 명은 지금 미 하원에서 보좌진으로 일한다. 아버지는 한미연합야전군사령관으로 복무하기 전에도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해 있으면서 종종 한국에 들러 심리전을 가르쳤다.”

-그런 인연으로 한국 근무를 세 번이나 자원했나.

아버지 에드윈 H 버바 주니어(가운데)가 한미연합야전군

“한국은 내게 외국이 아니다. 고향 같은 곳이다. 65년에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베트남전에 참전 중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나와 언니를 할아버지가 근무하는 용산으로 데리고 갔다. 세례를 받은 곳도 용산이다. 93년 동두천의 미 2사단 중대장으로 복무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도 분위기가 친숙했다. 이후 한국의 전통문화에도 심취해 사상의학도 배우고 한국의 들이며 산으로 나들이도 많이 다녔다. 할머니처럼 집 안도 한국식으로 꾸몄다. 침대도 한국의 고가구점에서 구입했고, 서예 작품도 많이 걸어놨다.”

-다음 근무지로 아프가니스탄을 택한 이유는.

“난 군인이다. 군인은 묵묵히 자신의 조국을 위해 헌신한다. 험난한 1년이 되겠지만 긴장되는 만큼 기대도 크다. (수도) 카불에서 군수참모 역할을 맡게 된다. 군수와 병참 분야에서 쌓은 모든 지식을 전장에서 쏟아부어 조국에 도움이 되고 싶다. 그동안 일부러 어려운 보직을 자원해왔다. 91년엔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고, 여군으로선 드물게 미 육군장관 부관도 역임해 워싱턴 포스트에서 기사화된 적도 있다. 어려운 일을 겪어봐야 성장한다.”

-아프간에서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하면 장군으로 진급해 한국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다.

“그럼 내 인생의 꿈이 이뤄지는 셈이다(웃음). 진급하지 못하고 퇴역하더라도 열심히 복무했으니 후회는 없다.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올 거라는 계획은 확실하다. 미군의 일원이 아니더라도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할 생각도 있다. 휴가도 한국으로 자주 올 것이다.(웃음).”

-한국을 떠나면 뭐가 가장 그리울 거 같은가.

“사람들이다. 한국인들은 유능하고 일에 열심이면서도 정이 넘친다. 등산을 좋아해 인왕산·북한산을 자주 올랐는데 혼자라도 외롭지가 않았다. 감이며 귤을 건네주는 아주머니들, 말을 걸어주던 할아버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아버지와 함께 복무했다는 퇴역 장성도 만난 적이 있다. 또 한국 음식과 찜질방도 그리울 것이다.”

-6·25전쟁은 일각에서 ‘잊혀진 전쟁’이 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절대로 잊혀져선 안 되는 전쟁이다. 피의 희생을 잊어선 안 된다. 올해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그 의미를 되새겼으면 한다.”

전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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