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현각 스님이 주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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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주 어설픈 한글로 쓰인 엽서 한 장을 받고 눈을 의심했다. 발신자 이름을 적는 자리에 '현각 합장' 이라고 또박또박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설마 『만행』을 쓴 현각은 아니겠지. "

현각(玄覺.37)스님은 언론과의 접촉을 피해 왔기 때문에 기자에게 엽서를 보낼 리가 없었다. 현각 스님이 언론을 멀리한 것은 스승 숭산(崇山)스님의 꾸짖음에 따른 것이다.

지난해 초 현각 스님이 『만행』으로 유명해져 여기 저기 인터뷰.강연 요청에 불려다니느라 공부할 시간이 없자 숭산 스님이 제자를 아끼는 마음에 한 마디 했다. "밥을 잘 지으려면 뜸을 많이 들여야 하는데, 뜸이 다 들기도 전에 솥뚜껑을 열면 밥이 설익는다" 는 가르침이다.

봉투를 열어보니 경북 영주에 새로 지은 현정사(現靜寺)라는 절이 문을 여는 행사에 초청한다는 내용이다. 초청자인 주지 이름이 다시 '현각' 이다.

"설마 미국인 스님이 주지를 맡을 수 있겠나. "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현정사로 전화를 했다. 설마가 사실이었다.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모습의 현각 스님이 한꺼번에 머리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나는 『만행』의 주인공 현각이며, 다른 하나는 '주지' 현각이다.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

『만행』의 주인공은 부제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처럼 멀고 먼 길을 단숨에 달려온 젊은 철학도, 그리고 순수한 구도열 그 자체였다. 불교를 전혀 모르던 미국 청년의 담담한 고백이 불교적 세계관에 익숙한 한국인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나아가 새삼 진부하게 느껴온 불교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것도 모두 그 구도열과 순수함의 힘이다.

미국 일류대 학생으로 보장된 출세길을 팽개치고 이국 만리 낯선 산사(山寺)를 찾아온 폴 뮌젠(스님의 본명)은 '버리고 비울 줄 아는 구도자' 의 모범으로 많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주지는 전혀 다르다. 절집의 우스갯소리 중에 "동냥하러 온 거지도 주지만 찾는다" 는 말이 있다. 주지라는 자리는 온갖 세속의 손길을 모두 헤아려 거두어야 하는 '사판(事判)' 을 대표하는 감투다.

수행과 구도에 전념하는 '이판(理判)' 과는 반대 개념이다. 세속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사판승이 있기에 이판승은 마음 놓고 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 사판승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구도자의 본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만행』의 주인공은 분명 이판이라야 어울린다. '만행(萬行)' 은 '구도를 위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떠도는 것' 이지 '한 곳에 머물며(住) 지니는(持) 것' 이 아니다. 현각 스님은 책에서 보여준 구도자의 마음, 즉 '초발심(初發心)' 으로 하버드에서 화계사로 달려온 것처럼 만행을 계속해야 어울린다.

물론 훌륭한 스님이면 이판 사판 가릴 것 없이 모두 잘 꾸려갈 수 있을 것이다. 주지라고 해서 수행을 못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현각 스님은 그를 가장 잘 아는 스승 숭산 스님이 "뜸을 들이는 과정" 에 있다고 지적한 젊은 수행자다.

아직 한국 말도 서투르고, 한국의 속세 풍경에도 익숙지 않다. 주지로 절을 관리하면서 수행을 겸하리라 기대하기는 힘들 듯하다. 한국 불교에 대한 실망감에서 애꿎은 미국 스님만 탓했다. 『만행』의 주인공을 잃고 싶지 않은 안타까움인가 보다.

오병상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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