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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외환·외자·외곬인생 40년 (5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55. 미국과 환율마찰

외자를 들여오는 것이 잘못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되도록 장기 자금을, 또 간접투자보다는 직접투자를 유치해야 하는데, 편한 맛에 단기 외자를 너무 많이 들여오는 바람에 화를 자초한 것이다.

복수통화 바스켓에 의한 변동환율제의 운용과 외자 도입이 이런 뜻하지 않은 결과를 낳은 것은 아무리 효과적인 정책도 적정선에서 억제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입증한다.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다.

내가 만들어 낸 변동환율 산출 공식 때문에 나는 훗날 재무장관이 되고 나서 미국과 환율 인하 교섭을 벌여야 했다. 오일 쇼크 때 단기자금 차입의 길을 튼 '업보' 로 1997년 말 외환위기 땐 우리나라가 끌어쓴 단기자금의 만기를 연장하러 뛰어다녔다.

5공 초 우리나라는 수출이 극히 저조했다. 이 때 수출 증진에 이바지한 것이 바로 고환율이었다. 정책적으로 환율의 효과를 십분 활용한 것이다. 김만제(金滿堤) 재무장관(현 한나라당 의원) 시절이었고, 이용성(李勇成) 국제금융국장(전 은행감독원장)이 앞장섰다.

이는 결국 미국과의 환율 마찰을 야기하고 말았다. 86년 미국이 고환율에 대해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 해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 총회에 나는 거버너(수석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내가 재무장관을 할 때였다.

미 대표단에서 이례적으로 우리 방으로 찾아오겠다는 전갈이 왔다. 미국은 멀포드 재무차관보가 부차관보 달라라와 함께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은 내게 환율을 내릴 것을 요구하는 한편 베이커 미 재무장관을 만나 보라고 권유했다.

나는 그 해 9월 열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 때 만나 보겠노라고 말했다. 환율 문제로 일국의 재무장관이 불려다니는 것으로 비쳐지면 모양새가 안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 해 8월 워싱턴에서 마침 IMF 잠정위원회가 열렸다. 나는 회의 참석을 구실로 베이커 장관을 만나러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미팅 참석보다 베이커를 만나는 것이 우선이었던 나는 재무부로 그를 찾아갔다. 우리나라 환율 개혁의 주역이었던 나는 환율에 관한 한 실무자나 다름없었다. 메모 한 장 없이 베이커와 배석한 실무자들과 몇 시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

베이커는 한국의 고환율 문제는 절대 그대로 넘어갈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의회에 대해 "이 정도면 만족스럽다" 고 얘기할 수 있을 때까지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슈퍼 301조의 적용을 시사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그 무렵 우리나라의 환율은 달러당 8백몇십원대였다. 미 재무부 실무자들은 최저 6백원대까지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87년 13대 대통령 선거 전에 8백원대까지 내리겠다고 말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선거라는 정치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강조했다. 그 정도만 해도 약 7%의 평가 절상이었다.

그러자 그가 대뜸 대선 이후에는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누가 알겠는가?

"나는 떠나야 할 사람이고, 그것은 선거결과에 따라 시작될 새로운 게임이다" 라고 나는 응수했다.

그 얘기 끝에 그는 환율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며 이 문제를 IMF에 넘기자고 말했다. 나는 좋은 아이디어라고 맞장구를 쳤다. IMF만 해도 국제기구라 환율 문제를 제멋대로 처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더욱이 두 나라 사이의 쌍무협정을 피하면 미국의 압력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환율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한 협의는 각각 IMF와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정인용 前경제부총리

정리=이필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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