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역사교육 다시 생각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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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 검정문제가 한.일간의 외교쟁점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는 한때의 외교적 현안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진정으로 역사가 해야 할 기능이 무엇이고, 바람직한 역사교육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민족 의식.정체성이 문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현재 일본에서 역사교과서를 왜곡하려는 세력이 내세우는 명분은 소위 자학(自虐)사관의 폐단을 극복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규정하는 자학사관이란 군국주의와 제국주의가 상징하는 민족사의 어두운 면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려는 역사서술 경향이다.

그들은 이러한 역사서술이 일본인들에게 수치심을 가져오고, 특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민족과 국가의식에 절대적인 해악을 끼친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민족사를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새로운 역사서술과 교육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의 민족사를 왜곡하려는 세력의 주장에 따르면 역사란 본질적으로 민족으로서의 의식과 정체성의 확립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논변은 사실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다. 민족사에 대한 비판적인 역사서술이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에 위기를 초래한다는 불만의 목소리는 과거사 반성에서 일본과는 대조적인 나라로 알려진 독일에도 결코 드물지 않다.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함양하는 것이 민족사 교육의 궁극적인 목표라는 생각은 아마 대단히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믿음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러한 견해를 받아들인다면 일본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많은 부분 논리적으로 자가당착에 빠진다.

제국주의 시대의 영화(榮華)를 그리워하는 일본 보수우익 세력의 국수주의와 역사의 피해자로서 민족의 주체성을 회복하자는 우리의 민족주의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반박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좋은' 민족주의와 '나쁜' 민족주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 둘의 경계는 모호하고 유동적이다. 오히려 민족주의는 순기능과 역기능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것이다. 그것은 잘 쓰면 유용한 도구이지만 잘못 쓰면 흉기가 되는 칼에 비유할 수 있다.

아무튼 민족사의 연구와 교육에서 민족의식과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 계급.종교.성.세대.지역 등 극히 다양한 집단적 정체성의 요인가운데 유독 민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만을 절대시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방법은 역사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있다. 스포츠 경기, 국경일 행사, 국토순례 여행 등은 단지 몇가지 예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현재 일본의 경우가 민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역사교육의 위험성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그렇다면 역사가 맡아야 할 진정한 역할은 무엇이고 역사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람직한 목표는 무엇인가. 역사의 소임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공개적으로나 혹은 은밀하게 작동하며 개인과 집단의 삶을 왜곡하고 억압해왔던 각양의 권력과 각종의 이데올로기를 밝혀내고 비판하는 것이다.

***계몽.비판정신 길렀으면

역사교육도 마찬가지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민족의 일원으로서 지녀야 할 민족정신과 애국심을 불어넣는 것이 역사교육의 목표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바람직한 역사교육의 방향은 오히려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위해 향후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갖춰야 할 비판정신과 참여의식을 키워주는 데 있다.

달리 표현하면 신화의 창조가 아니라 신화의 파괴가, 단결과 통합이 아니라 비판과 계몽이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목적이라는 말이다. 역사가 중요한 이유는 역사야말로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안목, 그리고 나아가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창의적으로 모색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를 계기로 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역사로부터 비판과 계몽의 기능을 기대한다면 앞으로 강화해야 할 국사교육의 목표와 방향에 대해서도 진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안병직 <서울대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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