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칼럼] 삼겹살회장과 티슈 페이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기업의 발전에 있어 원만한 노사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동부가 노사안정 정책에 힘을 쏟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 노사관계에 있어 기업의 자본이 어디서 왔는지, 경영자의 국적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외람된 얘기를 좀 하자면 내가 속해 있는 한국후지제록스는 올해 '무교섭 임금타결' 등 원만한 노사관계를 구축해 노동부에서 발간한 책자에 외국인 투자기업의 성공사례로 소개됐다. 또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사관계 모범사례 발표대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원만한 노사관계 구축을 위해 지난 1998년 4월 부임한 이후 나는 줄곧 노사간 커뮤니케이션의 개선에 힘써왔다.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정보의 전달차원이 아니라 회사의 슬로건인 '강하고, 즐겁고, 정다운 회사' 만들기의 일환으로, 말하고 보고 듣고 읽고 먹는 오감(五感)기능을 활용한 것이다. 한국의 실정에 맞게 지난 3년간 시행해 온 시책의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회사의 실적을 그래프나 표로 알기 쉽게 보여주고 주요한 이벤트나 뉴스를 숨김 없이 보여주는 것은 일반적으로 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문자보다 소구력이 강한 비디오 테이프를 주로 활용한다.

즉 분기별로 '보는 사보' 를 만들어서 경영자의 생각을 사원들에게 전한다. 사실 한국어로 설명하는 것이 아직 자연스럽지 못해 테이프에 한글 자막을 달고 있지만 문자와는 다른 친근감을 주는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됐다.

'읽는 사보' 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2개월에 한번씩 발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본래 상의하달(上意下達)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사원과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일년에 두번 '토크 플라자' 라는 대화의 광장을 마련해 현장에서 일하는 사원들이 경영자들과 자유롭게 의견교환을 할 수 있게 했다.

처음에는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기탄없이 말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가 됐다. 이를 통해 생산성 향상방안은 물론이고 현장에서 느끼는 사사로운 불만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누고 개선할 수 있게 됐다. 실제로 경영자들이 사사롭게 느끼는 것이 직원들에게는 큰 관심거리일 수도 있다.

한국에서 일을 하다 보면 '진실은 현장에 있다' 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전국 곳곳의 영업소를 방문해 현장의 상황을 직접 확인하고 사원 한명 한명과 얼굴을 익히며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도모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사원들과 함께 삼겹살과 소주를 나누며 솔직한 의견을 나누다 보니 직원들 사이에서 '삼겹살 회장' 이라는 별명도 얻게 됐다. '친근한 회장' 이라는 의미에서 사원들이 붙여줬다고 생각하니 매우 뿌듯했다.

이와 함께 정보인프라의 정비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원 한 사람당 컴퓨터 한 대를 설치하고 e-메일을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정보전달 속도가 빨라지고 커뮤니케이션이 개선돼 기대 이상의 생산성 향상 효과를 볼 수 있었다.

노동조합과는 분기별로 노사협의회를 갖고 월 1회 노조위원장과 자유로운 토론의 시간을 갖고 있다. 상호이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일본은 '충(忠)' 에 중점을 두고, 한국은 '효(孝)' 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가치관의 차이를 극복해 노사간에도 가족과 친척 같은 신뢰관계가 형성되면 한국에서도 '충' 의 정신이 발휘될 수 있다는 노조위원장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됐다.

한장의 티슈 페이퍼를 젖게 하려면 양동이에 집어넣어 한꺼번에 적실 수도 있고, 한 방울 한 방울 물을 떨어뜨려 적실 수도 있다. 전자는 한번에 적시는 것이 가능하지만 속까지 깊이 젖지는 않기 때문에 금방 말라버리는 단점이 있다.

반면 후자는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젖으면 쉽게 마르지 않는 장점이 있다. 모두들 한국인의 성격이 급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감히 후자의 방법으로 경영의 투명성을 이루고자 노력했다.

지난달에 열렸던 '노사 한마음 대회' 때 노조는 '노사화합과 무분규 선언' 을 채택했다. 이는 외국인 투자기업에서는 처음 있는 일로 한국 언론에 소개됐다. 삼겹살 회장으로서 지난 3년간 시간을 들여 티슈 페이퍼에 물방울을 떨어뜨려온 결과가 아닌가 싶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