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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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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그러나 인천 쪽에서 돌아오는 다른 피란민 일행들과 만나게 되어 그쪽 형편을 전해 듣고는 모두들 발길을 돌리게 된다. 이미 인민군이 들어왔다는 소문이었다.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동안에 우리는 인민군과 국방군이 대치한 전선 사이에 끼인 형국이 되어버렸다. 아마 오류동쯤에서 날이 저물었을 것이다. 해주 이모부가 큰길가에서 뻔히 바라다뵈는 농가에 찾아가더니 돈을 좀 치르고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농가의 삿자리를 깐 방에서 온 식구가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는데 석유 남폿불이 제법 훤했다. 작은 알감자를 껍질째로 넣고 끓인 고추장찌개가 아주 맛이 있었다. 그 방에서 온 식구가 웅크리고 날을 새웠는데 밤새도록 차가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튿날 기억나는 것은 어머니와 함께 길가에 나가서 지나가는 군용트럭을 구경한 것이다. 트럭의 앞자리에는 운전사와 지휘관이 탔고 뒷전 화물칸에 병력이 탔는데 맨 앞에는 소총을 차의 전방을 향하여 겨눈 군인 몇 사람이 섰고 나머지는 뒤에 앉아 있었다. 모두들 완전무장을 하고 철모에는 풀과 나뭇잎을 잔뜩 꽂고 있었다. 지나가던 지프가 우리 앞에서 서더니 어머니에게 묻는 것 같았다. 그 장교는 내게 건빵 한 봉지를 주고 가버렸다. 어머니가 식구들에게 말하기를 노량진이 최전선이라면서 수원 쪽으로 내려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어른들은 더 이상 피란가기를 포기하고 영등포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을 한 듯했다. 쌍방의 전선이 지나가고 나면 도심지로 들어갈 모양이었다. 비행기가 날아다니고 포성과 폭격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우리는 길에서 만난 다른 피란민 일행들과 가까운 논가에 있는 수로 아래에 들어가 밤을 새우기로 했다. 그것은 신작로 아래로 시멘트의 노관을 묻어 농부들이 통행도 하고 장마철에는 물도 내려가도록 해둔 작은 터널이었다.

우리 식구는 그 터널 속에서 이틀 밤을 지내게 된다. 첫날 새벽에 군인들이 다가왔다. 캄캄해서 그들이 어느 쪽 군인인지 알 수도 없었다. 그들은 손전등으로 사람들을 하나 하나 비춰 보며 조사를 하고나서 사라졌다. 이틀째 역시 새벽녘에 또 다른 군인들이 왔다. 나중에 어른들 얘기를 들어보면 그들은 남과 북의 정찰대나 수색대였다고 했다. 그날 밤에는 가까운 곳에서 총소리가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그리고 어린 나는 매우 인상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고 이 기억은 커서도 꿈에 나올 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군인들이 노관 안을 손전등으로 비춰 보더니 모두 나오라며 불빛으로 흔들었다. 아버지가 나를 등에 업고 있었다. 어머니는 두 누나들 손목을 잡고 우리 곁에 바짝 붙어섰다. 나는 아버지의 등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는데 그의 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군인들 중에 지휘자인 듯한 사람이 나서더니 묻더라고 한다. 당신들 누구를 지지하는가. 이 박사인가, 김 장군인가? 아무도 감히 대답하는 이가 없는데 누군가 김 장군이라고 대답하더란다. 그는 대뜸 다른 군인이 데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 대답을 재촉한다. 아무도 대답이 없자 지휘자가 말했다고 한다. '모두 갈겨버려!' 그러고는 총알을 재는 철커덕, 하는 쇳소리가 울린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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