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유감·미안·사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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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오와비(おわび)' 란 일본 말이 있다. 깊이 사죄한다는 뜻도 되고, 적당히 사과한다는 뜻도 된다. 미안한 감정을 표시할 때 폭넓게 쓰는 말이다. 굳이 말하자면 사죄와 사과의 중간쯤이라고 할까.

1998년 10월 8일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일본의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총리는 도쿄(東京)에서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이라는 긴 제목의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는 양국의 과거사에 대해 "통절(痛切)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오와비' 를 표명한다" 고 밝혔다.

오와비의 한글 표현문제로 당시 양국 외교 실무자들은 막판까지 밀고 당기는 진통을 겪었다. 한국측은 '사죄' 로 번역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일본측은 사죄라는 직접적 표현을 쓰지 않았다면서 이를 피하려 했다. 결국 한글로 된 공동성명에서는 사죄로 결론이 났지만 지금도 일본 정부는 오와비지 사죄가 아니라고 우기고 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사과 표현은 '말장난' 의 극치에 다름 아니다. 국교정상화 당시 "양국의 불행한 관계에 대한 한국측 설명에 유념하고" (65년)라는 군색한 표현에서 시작해 "유감스럽게도 불행한 역사" (83년), "통석(痛惜)의 염(念)" (90년), "깊이 진사(陳謝)드림" (93년)을 거쳐 "통렬(痛烈)한 반성" (95년)까지 왔다. 하지만 다시 불거진 역사 교과서 파동이 보여주듯 표현이 바뀐다고 과거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건 아니니 문제다. 어디까지나 외교적 수사일 뿐이다.

'공중충돌' 로 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과 중국이 사과 표현문제를 놓고 팽팽히 맞서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유감(regret)' 을 표명했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으니 '사과(apology)' 로 수위를 높이라고 중국은 미국을 몰아붙이고 있다.

중국어로 '이한(遺憾)' 으로는 안되니 '다오첸(道□)' 을 표하라는 것이다. 그러자 미국은 '미안(sorry)' 은 어떻겠느냐며 은근히 중국을 떠보고 있다. '바오첸(抱□)' 정도에서 타협하길 기대하는 눈치다.

사과에 따르는 보상문제와 국가적 체면을 고려하면 양쪽 다 쉽게 양보하긴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외교적 수사에 불과한 단어 하나 때문에 다투는 꼴이 보기에도 안좋고 불안스럽기도 하다. 중국을 정탐할 목적으로 정찰기를 띄움으로써 먼저 원인을 제공한 쪽은 어떻든 미국이다. 일단 깨끗이 사과하고 나서 따질 건 따지는 것이 세계 유일 초강대국다운 풍모 아닐까.

배명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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