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치도 성폭행도 살해도 안 했는데 시신은 숨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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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다 깨 보니 죽어 있었다.”

부산 여중생 납치 살해사건 피의자 김길태가 경찰 조사 닷새 만에 범행 자백이라며 한 말이다. 그러나 이 같은 김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엔 허점이 너무 많다. 김은 경찰에 “술에 취해 빈집에서 자고 일어나 보니 옆에 이양이 숨져 있었다”고 주장했다. 빈집에 혼자 자고 있는데 누군가 이양의 옷을 벗겨 살해해 놓고 갔다는 얘기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또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물통에 버렸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살인범이 아닌데 시신을 유기했다는 말이다. 단순히 성폭행범으로 쫓긴 그가 시신 유기를 자초했다고 보기 힘들다. 앞뒤가 맞지 않는 자기모순이다. 이와 관련, 경찰청 정지효 형사과장은 “김이 이양을 죽였다는 말은 안 했지만 그가 시체를 발견한 이후 한 행동에 대한 진술을 보면, 살해하지 않았다면 정확하게 얘기하기 힘든 것들을 진술했다. 살인을 시인한 자백과 같은 수준으로 볼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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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김은 왜 일부 자백으로 입장을 바꿨을까. 이와 관련, 범죄 전문가들은 김이 시신 유기 자백으로 납치와 살인 혐의를 희석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시신 유기의 경우 최고 형량이 7년으로 성폭행이나 살인에 비해 가볍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고 잠을 잤다고 진술한 것도 미리 계산된 진술이라는 분석이 있다. 지난해 나영이 사건 범인인 조두순의 경우 만취 상태에서 범행한 사실이 인정되면서 정상참작 논란이 일었다. 그동안 거짓말탐지기와 뇌파검사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김은 14일 오전 9시부터 3시간여 동안 거짓말탐지기 조사와 뇌파검사를 받았다. 김은 이 조사에서 답변에 거짓말 반응이 나오면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은 이양의 사망 추정장소 한 곳을 찍은 사진을 보여 주고 “아느냐”고 묻는 조사관의 질문에 “모른다”고 답했지만 거짓말탐지기에는 ‘거짓’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김은 이어 이양을 성폭행한 곳으로 지목한 장소 중 한 곳을 보여 주자 뇌파 움직임이 급변, 사실상 범행 장소를 알고 있음을 암시했다. 경찰은 이날 오전의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오후 들어 김을 강하게 압박하며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이에 앞서 김은 11일 오후 그의 가까운 친구와 대면하면서 울컥했다. 심경 변화는 사실상 이때부터 조금씩 시작됐다는 게 경찰의 말이다. 이어 12일 투입된 프로파일러들과도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심경 변화 폭이 커졌다. 덕분에 검거 초기 수사관과 단답식으로만 얘기하던 김은 점차 마음의 문을 열고 교도소에서의 생활과 친구 관계 등을 얘기하면서 감정 표현도 자주 했다. 또 13일 밤부터는 잠을 잘 때 이불로 얼굴을 뒤집어쓰는 데다 처음과는 달리 뒤척이는 시간이 많았다고 경찰은 전했다.

경찰청에서 파견된 프로파일러 권일용 경위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고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흉악범의 경우 처음에는 완강히 범행을 부인하지만 어느 순간 모든 것을 실토하는 경향이 있다”며 “김도 여느 흉악범처럼 어느 순간에 범행을 털어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양의 아버지는 김의 자백 소식을 듣고 “심장이 떨리고 말이 안 나온다. 어떻게 우리 예쁜 딸을 그렇게…”라며 흐느꼈다. 김의 양부모는 “자백을 했으면 다행 아니냐”며 짤막하게 답하고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다.

한편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김길태를 응원하는 팬 카페가 등장했다. 11일 개설된 카페의 회원은 860여 명으로 ‘석방 추진회’ ‘격려편지 쓰기’ ‘김길태 그림 그리기’ 등의 코너가 마련됐다. 카페 가입자들은 “김길태는 시대의 양심” “김길태는 무죄” “김길태를 석방하라” 등의 글을 올렸다.

부산=김상진·송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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