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분식회계 근절 대책의 핵심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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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금융감독원의 분식회계 근절 대책의 핵심은 두가지다. 수십년동안의 장부조작 관행을 없애는 과거와의 단절과 앞으로 회계분식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자는 미래의 장치 마련이다.

◇ 고백하면 행정상 면책〓금감원은 이번에 전기오류수정 등을 통해 과거의 분식을 바로잡은 기업에 대해선 감독당국의 권한인 감리를 1년동안 한시적으로 유예하기로 했다.

이 경우 이미 분식으로 처벌받은 기업과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형평성만 따지면 과거 악습과의 고리를 끊을 수 없다' 는 회계 전문가의 논리를 받아들였다.

금감원 관계자는 "잘못을 고백받은 뒤 그 잘못을 조사해 제재할 수는 없지 않느냐" 며 "적어도 감독당국 차원에선 과거의 회계분식에 대해 면죄부를 준다는 뜻" 이라고 설명했다.

김일섭 한국회계연구원장은 "금감원이 어려운 결정을 했다" 면서 "한번은 이런 식의 면죄부를 주는 게 불가피하다" 고 말했다. 누적된 분식을 털어낼 때 나타날 수 있는 혼란을 흡수하기 위한 장치도 마련했다. 은행 등에서 돈을 빌릴 때 당할 수 있는 불이익도 유예하는 것이다.

한 회계법인 관계자는 "부풀린 이익이 줄어들면 시장의 평가가 나빠져 자금 구하기가 어려워지므로 기업들이 한번 시작한 분식을 쉽게 멈출 수 없었다" 면서 "금리와 추가 대출에 문제가 없으면 기업의 장부조작 유혹이 줄어들 것" 이라고 말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재무제표가 악화된 기업에 대한 대출 여부는 은행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투명한 회계정보를 가진 기업을 우대한다는 점에 은행도 동조하고 있어 별 문제가 없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번 조치는 2000사업연도에만 적용되는 한시적 조치다. 즉 3월 말로 결산 공시가 끝난 12월 결산법인의 경우 이미 작성한 재무제표에서 과거 분식을 털어냈어야 한다. 3월결산 법인과 6월, 11월 결산법인들은 장부를 제대로 작성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

◇ 앞으론 안봐준다〓앞으로 적발되는 회계분식은 엄단된다. 금감원은 장부 조작이 드러나면 벌칙금리를 물리는 것은 물론 기존 대출의 만기 연장을 중단하고 신규 대출을 끊기로 은행과 협의했다. 매출이나 이익을 부풀리는 등 장부에 분칠을 하는 분식회계를 통해 노리는 '금융상 혜택' 을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또 장부를 감사하는 회계법인과 회계사에 대한 과징금을 각각 5억원과 1억원으로 강화해 분식회계에 동조했다가 발각된 감사인들이 지불해야 할 대가를 높였다. 회계분식 사실을 공개하도록 한 것도 시장의 힘으로 부실장부를 만든 기업이 퇴출되도록 하려는 의도다.

◇ 대책의 한계〓이번 대책이 분식회계 관련자에 대해 민형사상 모든 책임을 모두 면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법당국의 수사를 받거나 개인투자자가 소송을 제기하는 등 다른 경로에서 문제가 불거지면 금감원의 특별감리가 실시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이번 '시한부 면죄부' 대책의 실효성이 기대에 못미치리란 관측도 있다.

게다가 감독상 면죄부를 통해 분식 고백을 유도하려는 취지와 집단소송제에 분식회계를 한 감사인과 기업을 포함한 조치가 충돌한다는 지적도 있다. 교보증권 김석중 이사는 "소액 투자자 등이 기업이 인정한 과거 분식에 대해 소송할 경우 법정에서 질 게 뻔해 얼마나 많은 기업이 과거의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할지는 미지수" 라고 말했다.

시장 일각에선 금감원의 대책 발표가 늦어지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12월 결산법인들은 구제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금감원은 "지난해 말부터 간접적으로 과거의 분식을 털어내라는 이야기를 충분히 전달했다" 고 주장했다.

◇ 전기오류수정〓전년도에 실수나 누락 등으로 잘못 만들어진 재무제표를 다음해에 고쳐 이익.손실을 바로잡는 것을 말한다.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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