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는 만들어가는 것…객관적으로 전망하는 게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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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1930년대 미국의 변호사 벤저민 로스는 대공황을 겪으며 일기를 썼다. 이게 『대공황: 일기』라는 제목으로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됐다. 여기엔 전문가 의견을 바탕으로 ‘최악의 상황은 지났다’는 예측이 자주 등장한다. 실제 30년대 초 증시는 몇 차례 솟구친다. 전문가들은 시장에 돌아올 때라고 조언했다. 이들의 오류가 확인되는 데엔 6개월밖에 안 걸렸다.

자신의 분석도 계속 어긋났다. 1935~37년 사이에 경기가 활기를 띠었다. 36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이렇게 썼다.

“다들 술 취한 뱃사람처럼 돈을 쓴다.”

일주일 뒤 그가 덧붙였다.

“경기침체가 끝났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할 때가 온 듯하다.”

그러나 37년 9월 증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결국 39년 그는 결론을 내린다.

“지난 몇 년 동안 탁월한 경제학자의 전망을 다시 읽어보니 웃음밖에 안 나온다. 그들은 전부 틀렸다. 전문가에게 의지하는 건 시간 낭비다.”

그뿐이 아니다. 뉴딜 정책을 입안한 어빙 피셔는 1929년 뉴욕 주식시장이 붕괴되기 며칠 전 “주가가 영원히 이어지는 높은 고원에 올라선 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증시 붕괴 넉 달 뒤 “경기회복이 멀지 않았다”고 호언하며 직접 투자했다가 거금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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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최대 위기=경제학과 경제학자에겐 대공황 이후 최대의 위기가 닥쳐왔다. 미국의 저술가 조셉 엡스타인은 지난해 뉴스위크에 ‘경제학은 죽었다’는 칼럼을 싣고 “이번 경제위기로 경제학자들의 예측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드러났다”고 꼬집었다.

그는 오류를 남발하면서도 자신만만하기 짝이 없는 대표적인 경제학자로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의장을 맡은 래리 서머스를 꼽았다. “예측의 정확성을 타율로 바꾸면 서머스는 2할3푼쯤 될 듯싶다”며 “앞으로는 경제학자들이 TV에 나오면 야구선수들이 타석에 들어설 때처럼 그들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 밑에 평균타율을 보여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거장의 오판=현재를 잘못 분석하고 미래를 엉뚱하게 내다본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부동산 버블이 한창이던 2004년 2월 “거품은 없다”고 말했다. 벤 버냉키 FRB 의장은 2005년 미 상원의 의장 인준 청문회에서 “미국 금융 시스템이 여러 차례 위기를 거치며 역량이 강화됐고, 금융시장의 유동성과 유연성이 향상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 총재도 2008년 7월 “유로존의 경기는 2~3분기 하강한 뒤 점차 지속적 성장으로 돌아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유로존은 2~3분기 뒤 깊은 침체에 빠져들었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올해 초 미국경제학회 연례총회에서 “경제학자들은 미국의 금융시스템이 얼마나 허약한지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고, 금융시장 붕괴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고 개탄했다.

◆“경제주체는 비합리적”=경제학자들은 심리적인 요인을 소홀히 다뤘음을 인정하고 있다. 모두가 합리적으로만 움직이면 버블은 일어날 수 없다. 그러나 경제주체는 충동적이고, 그런 충동이 꿈틀거리는 시장은 자주 위험한 상태로 질주한다. 로버트 실러 예일대 교수가 그런 심리 변수를 중시하는 대표적인 경제학자다.

채희율 경기대 교수는 “(경제학자들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고 난 후 시장이 극도로 마비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강석훈 성신여대 교수도 “경제 변수뿐 아니라 심리적·정치적 요인을 모두 다룰 수 있는 통합적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예측 대신 변화를=경제학자가 인플레이션을 예측하면서 물가 대책을 함께 내놓았다고 치자. 이 처방이 채택돼 물가가 잡힐 경우 그 예측이 틀렸다고 하진 않는다. 장민 한국금융연구원 거시경제실장은 “경제학의 역할은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한다.

경제가 회복되다가 다시 가라앉는다는 더블 딥에 대한 경고도 마찬가지다. 더블 딥이 우려된다면 이를 피하는 길도 함께 제시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얘기다. 미래는 만들어가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전망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경제학의 ‘불편한 진실’이다.

백우진·이윤찬 이코노미스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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