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 서울] 주먹구구식 안전펜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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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1999년 봄 서울 서초구 반포동 프랑스 외국인학교 앞 도로에서 이 학교 학생 한명이 지나가던 승용차에 치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학교 출입구가 이면도로와 맞닿아 있었지만 도로옆에 안전 펜스 등이 설치돼 있지 않아 사고를 불렀다.

프랑스 국적의 학부모는 사고 수습 과정에서 다른 학생들이 같은 변을 당하지 않도록 학교 앞 보도와 도로 사이에 펜스를 설치하라고 서초구에 요청했다.

그들은 프랑스 규격에 맞는 펜스를 원했으며 얼마후 프랑스 기준을 적용한 설계도까지 보내 왔다. 길이가 45m에 불과한 펜스 설계도에는 세심한 배려가 담겨있었다.

안전과 미관을 고려해 철이 내장된 검은색 관을 사용토록 했고 아이들의 접촉에 대비해 모든 모서리를 곡선으로 처리했다. 관 사이의 거리와 전체 높이, 땅속에 고정되는 주기둥의 깊이도 꼼꼼히 표시돼 있었다.

서초구 관계자는 "국내에서는 보.차도 분리 펜스에 대해 대략적인 높이만 예시돼 있을 뿐 자세한 설치 기준이 없다" 며 "프랑스가 작은 시설물에까지 과학적인 표준을 정해 놓은 것을 알고 놀랐다" 고 말했다.

이에 비해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서울 시내 도로변 곳곳에 설치된 펜스는 우선 모양과 재질부터 제각각이어서 혼란스럽다. 또 위치 선정도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져 가로 경관을 떨어뜨리는 구조물로 전락한 곳이 많다. 특히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설치된 학교 주변 펜스도 일정한 설치 기준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22일 오전 서울 강남의 한 도로변 펜스는 중간이 끊어지고 한쪽 끝부분이 심하게 찌그러진 채 방치돼 있었다. 청소를 하지 않아 시커먼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도로 주변 여건이 같은데도 펜스로 막힌 곳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장치가 없는 곳도 있어 펜스 설치 때 지점별 특성이 고려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 대책〓국내에서는 일반 도로의 보.차도 구분 펜스 설치 규정이 마련돼 있지 않다.

자동차전용도로의 가드레일 등은 안전시설물로 분류돼 공식 규격 등이 정해져 있지만 시내 도로변 펜스는 각 구청에서 위치나 종류 등을 임의로 선정한다. 갖가지 펜스가 도로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따라 휴지통.가로등.가판대 등 다른 가로 시설물과 마찬가지로 시 차원에서 도시 미관을 개선하기 위해 전통미가 가미된 표준 모델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외국과 같이 학교 등 지점별로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구체적 설계 기준도 연구돼야 한다.

시 관계자는 "미관을 해치고 민원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도로변 펜스를 대부분 철거했던 적이 있다" 며 "교통사고 방지를 위해 반드시 설치해야 할 곳도 있는 만큼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고 말했다.

김성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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