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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외교 노선 vs 박용만의 무장투쟁 노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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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1913년 4월 호놀룰루 기차역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이승만(왼쪽)과 박용만. 한때 결의형제를 할 만큼 막역했던 두 사람은 독립운동 방법론을 둘러싸고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정적이 되고 말았다.(출처=유영익, 『이승만의 삶과 꿈』)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은 1904년 보안회(輔安會)가 주도한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에 몸을 던진 끝에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그는 이승만과 만나 의기투합하여 호형호제하는 동지가 되었다. 이듬해 옥살이를 끝낸 그는 의형(義兄)을 본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때 이승만의 외아들을 아버지 품으로 데려다 줄 정도로 두 사람 사이는 막역했다.

덴버에서 만학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1908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 입학해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군사학을 부전공으로 택하고 ROTC 과정도 이수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10년에는 한인 유학생의 80%가 모여 있던 네브래스카 주의 에이스팅스 대학 구내 기숙사에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해 한인소년병학교(The Young Korean Military School)를 열어 30여 명의 학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나아가 신한민보의 주필로 활약하면서 『국민개병설』(1911)과 『군인수지』(1912) 같은 책도 집필했다. 그는 둔전양병(屯田養兵) 방식으로 군사력을 키워 무력으로 일제에 맞서겠다는 웅지를 품었다. 1912년 학사학위를 딴 그는 소년병학교 1회 졸업생 13명을 배출하는 자리에서 이승만을 다시 만났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이상을 펼칠 최적지로 그 실천을 뒷받침해줄 교민집단이 있는 하와이를 택했다.

그해 12월과 이듬해 2월 하와이로 건너 온 두 사람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으나, 독립운동 방법론은 너무도 달랐다. 외교독립노선을 견지한 이승만과 달리 박용만의 지론은 무장투쟁을 통한 나라 되찾기였다. 박용만은 1913년 호놀룰루의 한 파인애플 농장(1360에이커)에 ‘대조선국민군단(The Korean Military Corporation)’과 부속 병(兵)학교를 세워 대한제국 군인 출신 이민자 124명에게 농장에서 10시간 이상 일하는 틈틈이 군사교육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눈에 비친 이 사업은 꿈 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1915년과 1918년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하와이 교민집단을 두 집단으로 쪼개 버렸다.

3·1운동이 터진 이틀 뒤인 1919년 3월 3일 박용만은 호놀룰루에서 단원 350명의 ‘대조선독립단’을 발족해 무장투쟁의 의지를 다시 불태운 반면, 그해 4월 이승만은 필라델피아에서 한인대표자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열어 ‘미국에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는 등 외교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결의(結義)형제는 숯과 얼음이 되어 서로를 없애지 못해했다. 그때 하와이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도 두 조각 내고 만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리더십 충돌은 세기를 건너뛰어 우리들의 가슴에 비수로 꽂힌다. 대의(大義)를 위해 소아(小我)를 희생하는 지도자가 보고 싶은 오늘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