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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공간1번지] 6. 망우리 공동묘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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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세상 사람 대부분이 영생할 것처럼 살아간다. 죽음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게 된다는 사실이다. 서서히 올 수도 있고 급작스럽게 찾아올 수도 있다.

실망스럽게도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다만 주검을 바라보거나 죽음의 과정을 지켜볼 수 있을 따름이다.따라서 죽음은 검증이 가능한 실험 대상이 못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삶에서 죽음의 의미는 너무나 중대하다. 죽음 자체로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의 중요성 때문이다.

내가 처음 주검을 본 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릴 적 기찻길 가에 놓여진 시신을 본 것 같기도 한데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분명히 본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 학교 가던 길에서 본 갓난 아기의 시체였다.정릉천변에 버려진 아기는 형체가 완연했지만 사람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심한 충격이었다.그 후 사고로 처참하게 목숨을 잃은 주검도 보았고, 친구의 시신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끔찍한 경험은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목격한 의과대학 해부학교실의 모습이었다.

더욱 기가 막힐 일은 그 곁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 학생들이었다.물론 요즘은 그런 일이 없으리라 믿는다.그들은 주검을 물건으로 대하는 듯했다.

생명이 끊기면 사람이라도 단지 물질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고등학교 시절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본 매장 광경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유족들은 대부분 슬픔을 인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공사판 인부들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유족 몰래 관 뚜껑을 열고 반지를 꺼내는 사람도 있었다.당연히 시체는 말이 없었다.시체는 담담했고 당당했으며 초연하기까지 했다.그렇게 본 것이 아니라 느껴지더라는 뜻이다.

여하튼 주검 앞에서 사람들의 삶은 무의미했다.저렇게 끝날 걸 왜 그리도 아둥바둥할까? 그 때 이런 생각을 한 기억이 난다.“최소한 중등학교 과정에서 공동묘지 견학(?)을 의무적으로 시행한다면 세상이 훨씬 차분해지지 않을까”하고 말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이양하의 ‘페이터의 산문’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스토아적 초연함이 이렇게 재현되고 있었다.

“느티나무 궤짝은 목수가 꾸며 놓을 때 아무런 불평도 없었던 것과 같이 부셔질 때도 아무런 불평을 말하지 않는다.어떤 사람이 있어, 네가 내일, 길어도 모레 죽으리라고 명언한다 할지라도 네게는 내일 죽으나 모레 죽으나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그 러니 가라. 배우가,그를 고용한 감독이 명령하는대로 무대에서 나가듯이. 아직 5막을 끝내지 못했다고 하려느냐?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는 3막으로 극 전체가 끝나는 수가 있다.그것은 작가의 상관할 일이오,네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기쁨을 가지고 물러가라.”

당시 나는 이 글과 쓸모도 별로 없는 염세철학서를 읽으며 집(청량리) 근처에 있던 망우리 공동묘지를 배회하였고 이런 방향으로 마음의 평정을 얻고자 노력했다.

덤으로 풍수를 접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우연일 뿐,본심은 병적일 정도의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불안을 잊기 위해서였다.하찮은 열등감도 그런 무덤 기행에 한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그곳에는 이름없는 민초들이 주로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유명인사들도 많았다.

오세창·방정환·한용운·조봉암·지석영·장덕수·박인환….당대를 주름잡던 인물들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그들은 민초와 함께 자리하여 절대 평등을 웅변하고 있으니 까까머리 학생의 열등감을 어루만져 주기에는 손색이 없었다고 생각했다.당연히 지금의 생각은 다르다.죽음에도 귀천이 있고 주검의 처리에도 계급이 있다는 것을.

본래 우리 풍습에 공동묘지라는 것은 없었다.민초들은 그저 마을 주변 야산에 나름의 성의를 가지고 매장을 했고,행세하던 양반들은 선산을 썼던 것이 대부분이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화장도 행해졌다.

사실 화장은 그 의식이 눈에 잘 띄기 때문에 성대하게 할 수 밖에 없고,땔나무 또한 비싸서 지배층이 아니면 할 수 없던 장법이었다.그리던 것을 일제가 1912년 장법 규칙을 제정하고 다음해부터 시행에 들어감으로써 본격적인 공동묘지제도가 들어선 것이다.

조상의 산소를 훼손함으로써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는 방법은 영국인들이 중국 침탈 과정에서 썼던 것이다.

그들은 중국인을 조롱하여 말하기를 “이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민족이다.나라가 망해도 가만히 보고만 있던 자들이 자기들에게도 이로울 도로 건설을 위하여 조상 산소 밑자락 조금을 깎아내는 일에도 목숨을 내걸고 대항을 한다”고.

일본인들은 그것을 좀 더 개발하여 우리나라에 적용하였다.조선총독부와 총독 관저의 터잡기가 대표적이 예이다.

망우리 공동묘지는 1933년 9월 이미 개설되어 있던 미아리·수철리(금호동)·신사리(은평구)의 3개 공동묘지가 좁아져 미아리에 제2묘지의 증설하는 과정에서 함께 등장하게 된다.

이곳의 지명이 시름을 잊는다는 뜻의 망우리(忘憂里)이기 때문에 흔히 태조 이성계가 자기 능자리를 잡고 오다가 이 고개에서 쉬며 “이로써 나의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於斯 吾憂忘矣)”라고 했다는 설화가 전해지나 그것은 지어낸 말일 뿐이다.

태조의 건원릉 터를 잡은 것은 태종 이방원이기 때문이다.아무려나 땅 이름으로는 재미있는 경우임에 틀림없다.

이 망우리 공동묘지 터 선정에 일제의 간계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 판단하는 이유는 우리 산의 할아버지이자 척추인 백두대간이 개련산에서 임진북예성남정맥(임진강 북쪽과 예성강 남쪽 사이 산맥)으로 갈리고, 이 맥은 다시 강원도(북한지역) 이천군 안협면 백운산에서 한북정맥을 일으킨 후, 한반도 최고의 음택 길지라 하는 검암산 명당을 일구며 건원릉을 비롯한 조선왕릉의 집결지인 동구릉을 구성하고 있는 발치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어디 감히 개국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들의 능발치에 공동묘지를 세울 염을 내었을까?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흘러간 역사가 되고 말았다.지금 망우리 공동 묘지는 더 이상 빈 곳이 없다.내가 본 바로는 이곳보다 더 인간적인 면모를 갖춘 공동묘지는 보지를 못했다.

산책로도 좋다.곳곳에 약수도 있다.위대한 인물들의 유택을 바라보며 그들의 업적을 반추할 수도 있다.

눈 덮이 망우리 공동묘지.아무래도 소심한 내게는 위인보다 사연많은 무덤에 더 눈길이 간다.“위인은 시대의 화근”이란 중국 속담도 있지만,오해 없으시길 바란다.거기에 묻힌 분들을 지적한 것은 아니니까.

애가 끊기는 듯한 아기의 묘비명,애끓는 우국충정의 불운했던 지사의 비문,요절한 시인의 시비,죽음조차도 끊어놓을 수 없을 것 같던 서로 사랑하던 사람들의 연문.

“당신이 태어났을 때,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당신이 죽을 때,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뻐할 수 있기를.” 체로키 인디언의 격언이다.그래,나도 울면서 세상에 태어났느데 웃으며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푸에르토 에스콘디도’라는 영화의 대사 한 대목이 떠오른다.“인생이란 다리와 같다.건너는 가되 집은 짓지 말라.”

눈이 녹아 질척이는 한 무덤을 보니 무덤 또한 허망한 삶의 자취란 생각이 들어서 덧붙여 본 말이다.

최창조 <풍수학자>

<최창조 풍수학자 약력>

▶1950년 서울 출생

▶서울대 지리학과 학사.석사

▶서울대.전북대 교수 역임

▶이인(里仁)지리사상연구회 대표

▶저서 : 『한국의 풍수사상』 『땅의 논리, 인간의 논리』 『터잡기의 예술』 『한국의 자생풍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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