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더 뜨겁다 99세 작가의 사랑 노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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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에 그건 성기(性器)였다. 겉모습은 꽃이고 잎이지만 쭈글쭈글한 구멍들과 울룩불룩한 질감은 여성과 남성 상징으로 보인다. 밑씨가 그득한 씨방, 오돌토돌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식물들이 하늘을 향해 꿈틀거린다. 붉은 핏빛 꽃들은 요염하면서도 풍요롭다. 사랑을 찾아 온 몸을 뻗은 식물의 사생활을 엿본 기분이다.

전시회 제목 ‘꽃(Les Fleurs)’은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시를 떠오르게 한다. 전시장에는 ‘보들레르에게’란 작품도 걸려있다.

프랑스 출신 미국화가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99·사진)는 나이가 무색하게 생에 대한 더 강렬한 에너지를 터뜨리고 있다. 100살을 향해 가는 ‘센티네이리언(centenarian)’ 루이즈는 오히려 아이가 돼버린 모양이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신관에서 24일 개막한 ‘루이즈 부르주아’의 드로잉·조각전은 오래 살아서 더 빛나는 한 여성 작가의 화려한 늘그막을 보여준다.

꽃은 생의 마지막에 다다른 한 인간이 사람들에게 내미는 마음이다. 부르주아는 다른 여인을 사랑해서 가족을 불행하게 만든 아버지, 불안한 자신의 영혼을 다독여주던 어머니, 양친이 남긴 상처와 그늘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삼아왔다. 몸에 대한 집요한 탐구도 피붙이와의 갈등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백수를 바라보는 노장은 긴 세월 속에서 애증조차 녹여버린다. 되풀이해 도상처럼 나타나는 다섯 송이 붉은 꽃은 다섯 명 가족을 의미한다. 피처럼 붉은 꽃들은 서로를 할퀴며 아픔을 주던 혈육이면서 동시에 용서하고 껴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조건을 암시한다.

부르주아는 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꽃은 보내지 못한 편지와도 같다. 아버지의 부정, 어머니의 무심을 용서해준다. 꽃은 내게 사과의 편지이자 부활과 보상의 이야기이다.”

백수(白壽)를 누리는 작가의 마음은 생명의 본향인 모성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탄생과 죽음을 한 몸에 지닌 여성의 육체는 그에게 가장 신비하면서도 아름다운 것이다. 부르주아가 뼈대만 응결시켜 그린 드로잉은 인간이 살아있을 때 알고 가야 할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 있다.

100살을 바라보는 루이즈 부르주아가 애증으로 얽힌 가족들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상징하기 위해 그린 ‘꽃’ 연작. 2009년 종이에 과슈로 그린 12점 드로잉 연작으로 각 59.6X45.7㎝. [국제갤러리 제공]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면 “예술의 목적은 두려움을 정복하기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부르주아의 진언이 실감난다. 자신의 자서전을 그림으로 털어버린 거장은 이제 다시 자궁으로, 땅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그의 작품을 즐기는 건 그가 관람객에게 남긴 덤이다. 02-733-8449.

정재숙 선임기자

◆루이즈 부르주아=191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벽걸이용 직물을 짜는 태피스트리 공방 일을 하던 부모 밑에서 일찌감치 미술에 눈을 떴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뒤 자신의 재능에 눈 돌려 미술학교와 페르낭 레제 같은 작가의 개인 작업실에서 공부했다. 38년 미국인 미술사학자인 로버트 골드워터와 결혼해 뉴욕으로 옮기며 화가이자 조각가로서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여성성에 바탕을 둔 과감하면서도 섬세한 작품들로 인정받기 시작해 8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여성으로는 처음 회고전을 열었고, 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거대한 거미상인 ‘마망’은 전 세계 주요 도시의 미술관과 거리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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