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자신감 위기에 빠진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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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 국민이 느끼는 자신감은 2004년 기록적인 수출 증가와 상당 수준의 외국인 직접투자에도 불구하고 아직 1997년 경제위기 이후의 최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는 개인과 국가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 부족뿐 아니라 깊게 자리 잡고 있는 불안감이 그 원인이다.

한국 사회 전반의 자신감 부족은 경제적 성격이 강하다. 현재 한국은 지난 경제위기에서 너무 빨리 회복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당시 소비를 시급히 회복시키려는 목적에서 신용 융자(credit facility)의 문을 거의 모든 사람에게 열었다. 이로 인해 소비는 회복됐지만 소비자 대출이 위험수준에 다다라 결국 당국이 대대적인 신용카드 단속에 나서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자 소비자는 빚 갚기에 바빠졌고 구매력은 급속히 떨어졌다. 2005년에는 소비자들의 경제에 대한 자신감도 어느 정도는 회복되리라 기대된다. 하지만 아직 지나치게 경직돼 있는 사회구조가 한국 경제 회복에 장애가 될 수 있다.

*** 동북아서의 위상 분명히 해야

현재 한국 기업은 단기적으로 허약해진 경제상태에다 중장기 문제들까지 겹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한국의 수출은 조선, 반도체 및 정보기술(IT) 등에 국한돼 있다. 비록 해당 분야에서는 세계 시장에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 취약성은 여전하다. 수출의 중국 의존도가 늘고 있는 것도 우려된다. 한국 기업들의 중국 러시가 계속되고 있어, 그 결과 한국이 원래 자국의 것이었던 기술과 제품을 중국에서 재수입하는 양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한국 기업들과 한국에서 활동 중인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이 동북아에서 중장기적으로 어떤 산업적 위치를 차지할지 분명하지 않은 점도 우려하고 있다. '동북아 허브' 프로젝트는 이제 '3대 경제자유구역' 프로젝트로 구체적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경제자유구역 설정이 과연 충분한 방비책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국이 경제 발전을 지속하려면 외국인 직접투자와 기술 유치가 필수적인데, 중국은 거대 시장과 저렴한 노동력을 갖추고 있다. 이를 극복하려면 한국이 좀 더 대담한 조치를 신속히 취해야 한다. 국내외 비즈니스 커뮤니티에 다시금 자신감과 신뢰를 심어 줄 수 있는 경쟁력 있는 산업정책 로드맵을 개발해야 한다.

국내총생산(GDP) 세계 10위의 한국이지만 국제무대에서 정치체로서의 자신감도 부족하다. 이는 한국 국민 개개인의 자신감에, 특히 젊은층의 자신감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 근본 원인은 역사에서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빈번히 외국의 영향이나 지배를 받았고, 사실상 독립적 외교정책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이 미국과 동등한 관계를 맺기를 바라면서 현 정권을 선택한 유권자들의 기대가 좌절된 것 또한 사실이다.

*** 사회적·정치적 현대화 필요

2004년은 한국이 독자적 국방력을 갖추지 못하는 한 독립적 외교정책 또한 가질 수 없음이 명백히 드러난 해였다. 단순한 무기 재배치 대신 한국은 시급히 핵심 기술을 획득해 자체 국방산업을 개발해야 한다. 자체 무기 개발보다 기존 장비나 체제를 갱신하는 편이 비용면에서 현명한 판단 같지만 이는 군사적.정치적 종속상태를 연장시키게 될 것이다. 물론 이는 미국의 대북정책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아직 미국 쪽 파트너의 의향에 맞춰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어 군사적.정치적 독립을 되찾고자 하는 한국의 노력이 사실상 크게 제한되고 있는 만큼 쉬운 결정은 아니다.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지만 말이다.

소위 'IMF 위기'에서 한국은 본격적 경제 구조개혁 착수에 성공한 바 있다.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중장기 도전과제를 헤쳐나가고 한국 국민과 외국 비즈니스 커뮤니티의 자신감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구조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사회적.정치적 '현대화' 또한 이뤄내야 한다.

장자크 그로하 주한 유럽상의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