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과 안동의 깊은 인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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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안동은 역사적으로 고려와 각별한 땅이다.

안동시 송승규(宋承圭)학예사는 “팔공산 등지에서 후백제에 패퇴를 거듭하던 고려군은 안동에서 삼태사의 도움을 받아 대승, 후삼국 통일의 승기를 잡았다”고 설명한다.

‘고려사’(高麗史) 태조 13년 조에도 관련기록이 나온다.

‘…12월에 견훤이 고창군(안동의 옛 지명)을 포위하므로 왕이 친히 가서 구원했다. 경인 13년 정월 병술일에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 병산에 주둔했으며 견훤은 석산에 주둔하니 양군의 거리가 5백보쯤 됐다. 드디어 접전해 저물 때까지 계속됐는데 견훤이 패해 달아났다.백제 시랑 김악이 포로되고 전사자가 8천여명에 달했다.…경인일에 고창군 성주 김선평(金宣平)을 대광(大匡)으로 임명하고 권행(權幸) ·장길(張吉)을 대상(大相)으로 삼았다.’

안동시 북문동 태사묘에는 지금도 이들 삼태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안동을 대표하는 차전놀이도 바로 이 전쟁을 상징화한 것이다.

이재춘(李載春)차전놀이보존회장은 “그래서 차전놀이엔 지금도 ‘왕건군’과 ‘견훤군’이란 깃발이 등장한다”고 설명한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두달여 안동에 머물렀다.안동사람들은 고려왕실이 그만큼 안동을 충절의 고장으로 믿었다고 생각한다.

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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