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 스승 쾌유 빌며 이 책 바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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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최하림(앞줄 왼쪽에서 셋째) 시인이 부인 정희숙(앞줄 왼쪽에서 넷째)씨와 서울예대 제자들, 문단 후배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선생님이 우리들 선생님이신 게 너무 고맙습니다.”(이원 시인)

“이탈리아 조각가 자코메티 작품 사진이 인쇄된, 여백 많은 표지가 선생님 시와 선생님 자신을 닮은 것 같습니다.”(박형준 시인)

18일 오후 경기도 양평군 문호리 ‘갤러리 서종’ 전시실. 최하림(71) 시인의 『최하림 시전집』(문학과지성사) 출간기념회가 열렸다. 1980년대 초반 최씨가 서울예대에서 3년간 시를 가르쳤을 때의 제자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이진명·장석남·박형준·이병률·이기인·이승희·김충규·이원 등 제자 시인들과 문단 후배인 김윤배·이창기·김기택·정끝별 시인, 소설가 정길연, 김이정씨 등 20여 명이 참석했다.

최씨는 제자와 후배들이 돌아가며 건네는 덕담을 귀 기울여 들었다. 흐뭇하거나 대견해 하는 표정이었다. “딸 같은 제자”라거나 “시 쓸 필요 없을 정도로 맑은 친구”라고 대꾸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씨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히고 시종 오른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였다. 예정된 한 시간이 지나자 지체 없이 자리를 떴다. 먼 길 달려온 제자들에게 친필 사인해 시전집 한 권씩 안길 법도 하련만 “아파서 필체가 망가졌다”며 극구 사양했다.

최씨는 암 투병 중이다. 지난해 봄 간암 판정을 받았다. 서종 갤러리 이달희 대표는 “최근 상태가 예전만 못하신 것 같다”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털고 일어나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끝별 시인도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아도 다들 선생님의 건강을 떠올리면 울컥 감정이 북받쳐 오를 것”이라고 했다.

최씨는 문학과지성사의 모태가 된 동인지 ‘산문시대’ 동인이었다. 고 김현 평론가, 소설가 김승옥씨와 함께 1962년 ‘산문시대’ 첫 호를 만들었다. 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일견 화려해 보이는 이력과 달리 문학적 성취에 걸맞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는 평가를 종종 받는다.

목포 출신인 최씨는 시를 통해 암울했던 70~80년대를 해명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91년 출간된 네 번째 시집 『속이 보이는 심연으로』에 실린 ‘죽은 자들이여, 너희는 어디 있는가’를 두고 김현은 1980년 광주 시의 백미로 평가한 바 있다. 2000년대 초반 한강물이 느릿느릿 흐르는 양수리에 정착하면서부터는 덧없는 세월 속에서 찰나, 순간을 붙들려는 보다 관조적인 것으로 변모한다. 요컨대 최씨는 안주를 거부하고 끝 없이 변화를 모색해 온 시인이다.

제자들은 그런 문학적 평가보다 작품과 삶이 일치하는 스승의 면모에서 더 많이 배웠음을 고백했다. “시에서나 삶에서나 기교나 욕망 같은 걸 추구하지 않은 담백한 분”(이원 시인), “잔잔한 호수 같으면서도 주위를 모두 담고 있는 분이셔서 스승으로 모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다.”(이병률 시인)

최씨는 “오늘 자리는 생각도 못했다. 과분하다.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이런 자리를 만들어준 제자들에게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누구 말마따나 투병도 자분자분, 조용하게 하는 모습이었다.

양평·글·사진=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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