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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정치역(驛)'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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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오노 반보쿠(大野伴睦.1890~1964). 패전후 일본정계를 좌지우지한 대표적인 막후 실력자 타입의 정치가.

1950년대 미키 부키치(三木武吉)같은 거물 정객들과 함께 보수세력 결집에 진력해 거대여당 자민당을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자민당 간사장.총무회장.부총재 등 요직을 역임했고 우리의 국회의장격인 중의원 의장도 지냈다.

국회의원 13선. 간사장 시절에는 총선에서 낙선한 의원들을 모아놓고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떨어지면 그냥 보통사람일 뿐이다.

다음에 당선하면 만나자" 고 냉정하게 내뱉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자기는 장관직이라고는 기껏해야 홋카이도(北海道)개발청 장관을 지냈지만 당료로서 워낙 영향력이 막강해 '대신(장관)제조기' 로 불릴 정도였다. 한 세대 아래인 가네마루 신(金丸信)이 오노와 똑같은 유형의 정치인이다.

오노는 일본 중부지방 내륙의 기후(岐阜)현에서 태어났다. 59년 도카이도(東海道) 신칸센(고속철도) 착공에 앞서 오노는 별다른 산업시설도 없고 인구 밀집지역도 아닌 자기 고향에 신칸센역을 유치하려고 막후에서 갖가지 압력을 행사했다.

그 결과 노선 조정이 이뤄져 탄생한 것이 오늘날의 기후하시마(岐阜羽島)역이다. 지역주민들로서는 대환영이었지만 기후하시마역은 지금도 출발지 도쿄(東京)역에서 종착지 신오사카(新大阪)역에 이르는 16개 역 중 이용률 면에서 하위권을 면치 못하고 있다.

대신 이 역은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역' 으로 불리게 됐고 '오노선(線)' 이라는 별명도 따라다닌다. 오노는 64년 도카이도 신칸센 개통을 몇달 앞두고 사망했다.

국회가 새해 예산 계수조정 과정에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선심.민원성 지역구사업 예산을 무더기로 증액해 눈총을 받고 있다.

호남쪽 예산 증액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영남쪽 예산을 쏠쏠하게 부풀리는가 하면 자민련도 지지 않고 자기네 텃밭 챙기기에 열중한 흔적이 짙다.

국회의원이 지역구를 챙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겠지만 증액 항목이 무려 1백40여건에 이른다니 누가 보아도 지나쳤다.

이제 전국 곳곳에 '민주로(路)' '한나라역(驛)' '자민선(線)' 이 등장할 조짐이다. 귀중한 예산을 이런 식으로 갈라먹는 일이 과연 정상인가. 정치인들의 낯 두꺼운 행태를 보면 세금 내기가 아깝다는 생각마저 든다.

노재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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