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윤동주 '십자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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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윤동주(1917~45) '십자가'

'서시' 로 끊이지 않는 울림을 이 땅에 풀어놓은 윤동주 시인이 어느날은 교회당의 십자가를 올려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처럼 행복한 피흘림을 허락받기를 기도한다.

나라 잃고 이국땅을 떠도는 젊은 사나이가 안으로 흘리는 이 피의 글자들을 누가 다 읽으랴. 저 용정 산 언덕의 무덤에서 이제는 또 어떤 괴로움으로 이 크리스마스 아침의 종소리를 듣고 있는가.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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