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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성숙한 졸업식 문화를 만들어 나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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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중학교 졸업식 후 남녀 학생들이 교복을 찢고, 계란 세례를 벌인다. 반나체 학생들이 업고 업히며 바닷물 속으로 들어간다. 심지어 알몸으로 뒤엉켜 뒤풀이를 한다. 부동자세를 한 졸업생을 선배들이 돌아가며 주먹으로 속칭 ‘졸업빵’도 먹인다. 졸업 시즌을 맞아 전국 곳곳에서 벌어진 풍경이다. 특히 인터넷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이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졸업식에서의 일탈행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자신을 옥죄어 온 입시와 학교생활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복종과 속박의 상징인 교복을 찢도록 했을 터다. 깨끗이 씻고 거듭나라고 밀가루를 뒤집어 씌웠을 것이다. 학업을 마친 충족감과 새로운 학업에 대한 설렘을 해소하고 발산할 마땅한 분출구나 문화가 없어 더욱 그랬을지 모른다. ‘졸업의 해방감’이 다소 거칠게 표출되는 것은 용인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폭력을 넘어 성적 학대 수준으로 치닫는 최근의 행태는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약자에 대한 막무가내식 폭력’의 차원으로 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권력에만 맡겨놓을 수만도 없는 사안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포함해 졸업문화에 대해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고민할 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한국사회는 예로부터 ‘책거리’의 풍습이 있었다. 자녀들이 서당에서 천자문, 동몽선습, 소학 등을 배우면서 한 권을 뗄 때마다 베풀었다. 국수를 삶고 송편을 빚어 스승의 노고에 보답했다. 동시에 회초리를 견디며 배움의 단계를 하나 높인 자녀도 격려했다. 이를 ‘책씻이’나 ‘세책례(洗冊禮)’로도 부른 것은 책을 단정히 해 서가에 두거나 후배에게 물려주기 위함이다.

물론 이런 풍습을 재현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깃들어 있는 ‘정신’만은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 요즘의 졸업식은 깊은 감사도 애정 어린 격려도 없이, 단순하고 지루한 의식(儀式)만 있기 때문이다. 꽃다발의 주인공은 학생들을 주야로 챙기며 봉급의 대부분을 교육비로 쏟아 부은 부모도,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 애쓴 선생님도 아니다. ‘공부하는 게 벼슬’인 학생들이다. 졸업식은 ‘마지막 수업’이다. 성찰의 지혜와 감사함을 아는 예의, 미지의 세계를 맞이하는 용기를 가르치는 자리다. 그런 점에서 경기 대명고의 세족식(洗足式)은 귀감이다. 학생들이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부모님의 발을 씻겨준다고 한다. 교복과 교과서 물려주기 마당을 열거나 지역축제로 승화시킨 학교들도 바람직하다. 이렇게 학교 나름대로 여건과 특색을 살려 멋있는 전통을 만들어 간다면 일부 학생의 일탈행위도 줄어들 것이다.

졸업을 영어로 ‘커멘스먼트(commencement)’라고 한다. 시작이란 뜻이다. 기나긴 인생 역정에서 하나의 시작이 끝나고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는 것이다. 학부모와 교사, 그리고 학생이 성숙한 졸업문화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