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나는 음악을 좋아했다.
지금도 좋은 음악을 들으면 넋을 잃는다.
음악에 미쳤던 어린 시절, 음악선생님이 '이 곡은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빈(Wien) 숲 속을 거닐다 영감을 얻어서 작곡한 것' 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영감을 얻어서…' 라는 말이 신기하게 들렸다.
*** 잠결에 들린 하늘의 선율
우리 동리에 조그마한 공원이 있었다.
베토벤이 빈 숲 속을 거닐다 영감을 얻었다고 해서 나는 우리 동리의 공원을 헤맸다.
혹시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 였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음악 책 안의 베토벤이 빈 숲 속을 거닐고 있는 사진을 다시 본다.
사진은 등을 약간 구부린 채 두 손을 등 뒤로 돌려 뒷짐을 지고 걷는 모습이었다.
나는 베토벤의 흉내를 내보았다.
나에게도 영감이 찾아올까 싶어서였다.
헛수고였다.
영감이라는 말이 가져다주는 불가사의한 어떤 세계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영감의 정체에 대한 대답을 나에게 제공해주지 않았다.
결국 영감을 포기했다.
그 대신 그 동안 해오던 피아노 공부에 다시 매달렸다.
피아노가 집에 없었던지라 언제나 구걸 피아노를 쳤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교회에서 구걸로 얻은 피아노 시간이 아까워 끼니도 포기하고 연습을 했다.
시장끼와 피곤함에 못이겨 잠시 피아노 앞에서 졸았다.
내 손은 피아노 건반 위에 그대로 얹혀 있었다.
어디선가 '미 래 도' 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결에 '미 래 도' 라는 소리를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영감이다" 싶었다.
하늘로부터 '미 래 도' 라는 영감의 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으로 나는 착각했다.
졸린 채로 약간 몸을 움직인 덕분으로 건반 위에 얹혀진 내 손이 피아노 건반을 '미 래 도' 라는 순서로 누르게 된 것이 소리가 난 원인이었다.
아무튼 그 '미 래 도' 라는 소리가 나에게 준 충격은 대단했다.
그 때부터 나는 피아노 앞에서 일부러 졸았다.
손을 피아노 건반 위에 얹어 놓고, '미 래 도' 만이 아니라 '도 래 미' '미 미 도' 식으로, 졸린 척하면서 건반을 달리 눌러보았다.
잠결에 어디선가 서로 다른, 수 많은 선율이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 마음에 흡족한 선율이 생기기도 했고, 불만스러운 선율이 생기기도 했다.
나는 그 때부터 나에게 하나의 확신이 생겼다.
비록 나에게 영감은 없었지만 피아노 건반 위에서 낸 소리 중에서 내 마음에 드는 선율과 들지 않는 선율을 확인할 수 있는, '나의 음악 마음' 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때부터 나는 피아노 공부보다 피아노 앞에서 건반 위에 손을 얹고 졸기를 더 좋아했다.
내가 미국에 유학 갔을 때의 일이다.
작곡가 코플랜드가 '영감은 없다' 라는 강연을 했다.
다음이 강연의 요지였다.
인간은 누구나, 어쩐지 그 친구 생각이 난다, 어쩐지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어쩐지 작곡을 하고 싶어진다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고 했다.
이 '어쩐지' 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바로 영감이 찾아오는 순간이라고 했다.
*** 긍정적 사고가 영감의 원천
그냥 살 때와 '어쩐지' 가 찾아올 때의 삶에서는 인간의 마음이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성격이 달라진다고 했다.
다만 이 '어쩐지' 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에 따라 그 찾아옴을 잘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이 영감이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곧 내년이다.
많은 걱정이 앞선다.
우리 모두의 삶과 문화를 위한 영감을 나는 기원한다.
내년에는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가 '어쩐지' 잘 풀릴 것 같다는 생각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생겼으면 좋겠다.
마음 안에 그러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에 떠오른 그 '어쩐지' 를 잘 처리하게 하는 능력과 문화가 우리에게 생겼으면 좋겠다.
'어쩐지' 때문에 위대한 예술가가 위대한 작품을 낳듯이, 우리나라에 찾아오는 그 '어쩐지' 때문에 우리 모두의 삶이 내년부터는 참으로 보다 나은 삶이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