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74> 스티브 잡스와 불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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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요즘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화두네요.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표지에서 아예 스티브 잡스를 ‘성경 대신 아이패드를 손에 든 예수’에 빗댔더군요. 사람들이 주목하는 건 잡스의 창의성(창조성)이죠. 젊었을 적, 그는 선불교와 명상에 심취한 바 있습니다. 잡스의 창의성, 그 뿌리가 뭘까요. 불교적 코드로 스티브 잡스를 풀었습니다.

◆번뇌가 보리(菩提·지혜)다=현실은 변하죠. 끊임없이 변하죠. 워크맨이 MP3로 바뀌고, MP3가 스마트폰으로 바뀌죠. 스마트폰 역시 또 다른 무언가로 바뀔 겁니다. 미리 정해진 것은 없죠. 변화의 기로에선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그 와중에 어떤 에너지는 고전이 되고, 어떤 에너지는 첨단이 되죠.

잡스는 ‘에너지의 치환’을 주목합니다. 음악은 인간의 오랜 역사와 맥을 같이 하는 고전적 자원이죠. 그만큼 내재한 에너지도 엄청나죠. 그런데 음악 파일의 등장과 무료 다운로드 등으로 음반시장은 나락으로 추락했습니다. 회복할 기미가 안 보였죠. 그걸 아이팟을 필두로 한 MP3 플레이어가 되살렸어요. 소멸의 에너지를 생명의 에너지로 치환한 겁니다.

그건 “번뇌가 보리다!”하는 불교의 이치와 맥이 통하죠. 에너지 자체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죠. 다만 그 쓰임에 따라 긍정의 에너지도 되고, 부정의 에너지도 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죠. 108 번뇌가 108 지혜로 바뀌는 겁니다.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죠. 문제는 치환의 능력입니다.

잡스도 마찬가지죠. 그는 죽었나, 살았나를 따지기 전에 음반시장의 거대한 에너지를 먼저 봤을 겁니다. 그런 다음에 숨결을 불어 넣을 방법을 찾은 거죠. 듣고(아이팟), 말하고(아이폰), 보고 읽는(아이패드) 인간의 근원적 습성에 대한 오랜 관찰과 깊은 이해, 거기서 나온 간파력이 스티브 잡스표 창의성의 뿌리입니다.

◆불이(不二)의 에너지=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잡스는 축사를 했습니다. 돈이 없어 6개월 만에 대학을 중퇴했던 그가 대학 졸업식장에서 처음 연설을 한 거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이다(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주시하라. 머물지 말라(Keep looking, Don’t settle).”

이 말에는 “나와 세상이 둘이 아니다”라는 ‘불이(不二)의 시선’이 녹아 있죠. 잡스는 ‘내가 사랑하는 일’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가 될 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의 파워를 압니다. 상대와 내가 하나가 되면 굴리는 에너지도 커지는 법이죠. 일도 마찬가집니다. 사회에 첫 발을 딛는 젊은이들을 향해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을 하라”는 잡스의 조언은 “내가 쏟아내는 창조성의 뿌리가 어디인가”에 대한 ‘강렬한 힌트’를 준 셈이죠.

◆창조와 파괴=잡스는 애플의 창업주죠. 그런데도 30세 때 애플에서 해고되고 말았어요. 엄청난 배신감도 느꼈겠죠. 나중에 그는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그 후 성공에 대한 중압감에서 벗어났다. 초심자의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불확실했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창조적인 시기로 들어서게 됐다.”

창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파괴죠. 완전한 파괴의 순간이 완전한 창조의 터전이죠. 개인도 그렇고, 기업도 그렇죠. 성공한 뒤에는 성공했다는 마음을 놓고, 실패한 뒤에는 실패했다는 마음을 놓아야죠. 그래야 개인도, 기업도 포맷이 됩니다. 그런 포맷 과정이 바로 창조를 위한 파괴의 과정이죠.

중국 육조 혜능 대사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應無所住 而生其心)”고 했습니다. 잡스 식으로 풀면 “변화를 주시하라, 머물지 마라(Keep looking, Don’t settle)”가 되는 거죠.

잡스의 창조성은 놀랍습니다. 그러나 갓난 아기 적의 입양과 대학중퇴, 강한 외고집과 간이식, 췌장암 수술 등 삶의 상처를 치유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진정한 종교적 창조성은 온전한 치유를 동반하죠. 잡스의 창조성이 여전히 미완으로 비치는 까닭입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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