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업체 사장 은행털다 붙잡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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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4개월째 밀린 하숙집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돈을 훔쳤습니다."

지난 7일 명동의 한 은행에서 6천만원을 훔치다 붙잡혀 8일 서울 중부경찰서에 의해 구속영장이 신청된 朴모(49)씨는 흐느끼 듯 말했다.

"운영하던 회사가 부도나면서 아내(45)와도 생활비 문제로 자주 말다툼을 하다 별거에 들어갔습니다. 외환 위기 전 미국에 유학보낸 외딸(19)도 다음주면 기숙사에서 쫓겨날 판인데 비행기표 살 돈이 없어 귀국하지 못하고 있구요. "

朴씨는 1998년 다니던 건설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실직했다. 그러나 친척과 친구로부터 빌린 돈으로 청소용역업체를 차려 재기했다.

한 때 직원 1백50여명을 거느리며 한달 매출액이 30억원에 이를 정도로 잘 나가는 회사로 키웠다.

그러나 최근 경기가 악화하면서 용역을 받은 회사들이 줄줄이 쓰러져 청소비를 받지 못하면서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지난 7월에는 자택인 아파트까지 팔아치우고 광진구 자양동의 조그만 아파트에 보증금 없이 60만원짜리 월세로 들어갔다.

朴씨는 그러나 10월 중순 사무실 임대료와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 발행했던 어음을 막지 못하고 끝내 부도를 내고 말았다.

朴씨는 7일 집주인과 말싸움을 한 뒤 집을 나왔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명동을 거닐던 朴씨의 발길이 멈춘 곳은 은행 앞. 창구 안에서 옮겨지는 돈 뭉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점심시간 직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출납창구로 들어가 1천만원짜리 여섯 묶음을 훔치다 직원들에게 발각됐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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