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천상병 '주막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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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골목에서 골목으로

거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시인의 보람인 것을…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 순하게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 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 천상병(1930~93) '주막에서' 중

무슨 큰 욕심이 있으랴,저물녁 천정 낮은 주막집에 들려 할머니가 따라주는 한 잔에,한 잔만 더 있으면 사는 일이 몽롱하고 장엄한 것을.눈이 흐리멍텅해져야 세상도 순하게 보이고 빈 호주머니 속에 행복도 만져지는 것을.

시가 있으니 술이 좋고,술이 좋으니 시가 절로 샘솟는 천상병시인이 하늘로 돌아간 지도 일곱 해,“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지금쯤 또 어느 주막에서 할머니 등 뒤의 산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것을 보고 있는지?

이근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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