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누굴 위한 개헌론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개헌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유력한 정치인들이 입이라도 맞춘 듯 헌법을 고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새해 정국의 최대 이슈를 개헌으로 예상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개헌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권력구조와 관련된 주장들은 크게 세가지다. 하나는 내각제. 자민련 사람들이 가장 적극적이다. 현직 대통령과 자민련 명예총재가 1997년에 함께 발표했던 공약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대통령 중임제다. 대통령의 단임조항을 연임 허용으로 고치자는 게 골자다. 끝으로 대통령선거 때 부통령도 함께 뽑자는 정.부통령제다. 미국식 모델이다.

중임제나 정.부통령제는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차기대권 주자들 가운데 여러명이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중이다.

각각의 개헌론에는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다. 내각제나 부통령제는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고, 지역대립을 누구러뜨릴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운다.

중임제는 조기 권력누수 방지, 통일 등 국가적 과업의 지속적 추진 효과 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다 "5년 단임제는 노태우.김영삼.김대중씨 3인의 합의인 만큼 셋 다 대통령이 된 지금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는 역사적 배경이 곁들여지는가 하면, "(내각제)약속지켜라" 는 단순 명료한 요구도 있다.

문제는 그 순수성이다. 최근 제기되는 거의 모든 개헌론에는 주장하는 사람 또는 세력의 이해가 담겨 있다.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으면 "한번 더 하겠다" 며 중임제를, 집권 희망이 없으면 "차라리 대통령제를 폐지하자" 며 내각제를, 당장 대통령이 되기 어려운 쪽은 "나눠먹자" 며 정.부통령제를 주장하는 식이다.

이래서는 아무리 "국가의 백년대계를 생각해 고칠 것은 고치자는 얘기" 라고 강변해도 설득력을 잃게 된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게임의 룰을 바꾸겠다는 발상이란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권력자들의 장기집권욕으로 누더기가 된 우리 헌법이다. 53년 동안 아홉번을 뜯어고쳐 세계적 웃음거리다.

개헌을 한 권력자들은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사오입 개헌으로 연임제한을 폐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이 3선개헌과 유신을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훨씬 더 높은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을 것이다.

정치권 일각이 제기 중인 '남북관계의 진전을 담아낼 헌법개정' 주장에 대해 "권력구조 개편논의를 끌어내려는 유인책 아니냐" 고 경계하는 것은 과거의 불행한 경험 때문이다.

개헌이 된다 해도 문제다. 레임덕을 막자고 중임제를 해도 긍정적 효과만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폐해가 더 클 수도 있다.

현직 대통령이 재선을 위해 뛰기 시작하면 우리 풍토에서는 일선 동사무소.파출소까지 선거운동에 내몰릴 게 분명하다.

군과 정보기관도 예외일 수 없다. 반면 야당은 독재정권 때 그랬던 것처럼 하루하루를 독립운동하는 기분으로 보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두번째 임기 때의 레임덕은 어쩔 것인가.

부통령제 도입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인사권과 정보.조직을 독점한 상태에서 부통령은 장식용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독자권한을 가진 강력한 부통령이 출현하면 권력투쟁과 분열로 정국불안이 가중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 형편은 개헌타령으로 시간을 보낼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것도 제 잇속을 차리겠다는 계산이 담긴 주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김교준 <정치부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