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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빚탕감 아닌 농정 기본개혁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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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엊그제 농민들이 '농가부채 경감을 위한 특별조치법' 제정을 요구하면서 고속도로를 가로막는 등 전국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무분별한 농산물 수입과 파행적 농정으로 농가부채가 급증하고 농촌경제가 파탄에 빠져 있다는 농민단체의 주장에는 분명히 경청해야 할 부분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시위라는 목적 달성 방식과 농가부채 경감의 요구 내용에는 문제가 많다고 본다.

무려 38조원에 달하는 대출금은 농민 스스로 해결하기에 벅찬 측면이 있다. 농가당 연간 소득은 2천3백만원이 채 안되는데 빚은 가구당 2천만~3천만원이나 된다.

빚 갚기 위해 빚을 내니 부채도 많아진다.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경쟁력이 취약한 국내 농가가 소득을 늘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

농어촌 구조개선계획에 따른 화훼와 특작물, 축산농업 육성은 대규모 지원에 따른 과잉생산 문제로 상당수 농가가 낭패를 보는 등의 농정 실패도 있었다.

외환위기에 따른 소비 감소와 비료나 농약 등 원재료비 상승으로 수지구조가 크게 악화한 것도 농가부채 급증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농민단체의 무조건적인 경감 요구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고부채 농가가 중농 이상의 고소득 농가에 많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장 무차입 농가는 물론 그동안 성실히 상환한 농가와의 불공평성 문제가 생긴다.

도시 빈민과 저소득층 등에 대한 형평성 문제도 있다. 원리금 상환 유예와 감면의 후유증도 있을 수 있다. 농협을 지원 주체로 할 경우 가뜩이나 부실한 농협에 공적자금이 투입될 우려도 있고, 재정지원 방식도 국가채무가 많은 데다 제2의 경제위기 우려로 여유가 많지 않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따라서 농민들도 고통의 분담 원칙에 따르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 정부 역시 벌써 여섯 번이나 마련한 농촌 부채 경감대책과 같이 '울면 떡을 더 주는' 식의 도덕적 해이에서 벗어나 근본적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정부 스스로 시장개방에 따른 현실적 한계와 외환위기에 따른 불가피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할 일을 제대로 못한 측면도 있었다.

차제에 농업도 투명성과 책임성에 입각한 구조조정을 추진하기를 제안한다. 부채를 경감해 주면 살아날 수 있는 농가와 그렇지 않은 농가를 구분하고, 추가 지원을 받는 농가는 일정 부분 책임을 지고 회생 불능 농가는 퇴출시키는 등의 워크아웃 방식을 신중하게 도입할 필요가 있다. 빚을 갚기 위한 농지 등 자산의 매각이 원활해지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여기에 농업이 수익성 있는 비즈니스가 되도록 농업기술.유망 농작물.농업유통구조 혁신 등을 정부가 꾸준하게 추진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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