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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사옥이 뭐길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현대그룹이 서울 계동의 본사 사옥을 팔기로 했다. 청와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빌딩은 현대가 국내 재계 1위를 막 굳히기 시작했던 1983년 완공해 입주한 '현대의 영광' 을 대변하는 건물이다.

현대는 건설이 유동성 위기에 빠진 뒤 네차례나 발표했던 자구안에서도 사옥 매각은 뺐다가 지난 20일 최종안(5차)에서 추가했다.

불과 한달 전 현대차가 계동 사옥을 사겠다고 했지만 이 때는 현대가 거절했다. 이 기회를 놓친 뒤 뒤늦게 계열사에 팔기로 했으나 쉽지 않을 전망이다. 현대차는 이미 다른 건물을 샀고 중공업.상선도 매입을 꺼리고 있다.

현대가 사옥 매각을 주저했던 것은 집에 대한 '한국적 집착' 때문이 아닌가 싶다. 사옥을 업무공간보다는 투자대상이나 기업의 상징물로 여기는 풍토 탓이다.

기업 관계자들은 사옥을 팔아봐야 임대료 내고 담보를 해소하면 별로 남는 게 없는 데다 자칫 '얼마나 급했으면' 하는 의심까지 받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몇몇 투신사들은 97년 외환위기 때 사옥을 팔려다 고객들이 예금 인출 조짐을 보이자 황급히 철회했었다.

LG 한 임원은 "신입사원 면접을 해보면 '건물이 멋있어서' 라는 지원사유가 의외로 많다" 고 말한다.

대우는 90년대 초 서울역 앞 본사 사옥을 팔라는 채권단 요구를 받았으나 계열사 매각으로 대신했다. 당시 건물값이 1천5백억원쯤 했는데 이것 저것 제하면 남는 게 2백80억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산업사를 살펴보면 사옥이 기업 흥망의 계기가 된 사례가 많다.

서울 용산의 28층 국제빌딩은 국제그룹이 85년 완공후 입주 석달만에 그룹 해체 비운을 맞았고 이를 인수한 한일그룹도 98년 퇴출 판정을 받았다.

국내 최고층인 63빌딩을 지은 대한생명도 부실기업으로 전락했으며 서소문 유원빌딩도 이를 지은 유원건설이나 인수한 한보 모두 망했다.

이때문에 "사옥을 사거나 지어도 3년이 지나봐야 진짜 주인인지 안다" 는 말도 나온다. 사옥 마련에 수천억원씩 들지만 사옥 자체로는 돈을 못 벌기 때문에 '가장 조심해야 할 투자' 라는 것이다.

베스트 셀러인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를 보면 "대출받아 큰 집 사는 것은 어리석은 것" 이라 할 정도로 선진국에선 '부동산=위험자산' 인식이 있다.

국토가 비좁고 농경사회 전통을 가진 우리는 땅과 집에 집착이 많지만 이런 추세도 점차 바뀌고 있다. 금호는 입주도 하지 않은 건물을 팔 계획부터 세웠다.

지난 7월 서울 회현동 사옥을 싱가포르 투자청에 5백억원에 판 데 이어 이달 말 완공하는 신문로 18층 사옥도 해외매각을 추진 중이다. 금호는 이 건물을 판 뒤 세들어 살 계획이다.

두산은 98년 을지로 사옥을 하나은행에 6백억원에 판 뒤 동대문으로 옮긴 것을 구조조정의 대표적 성공사례로 스스로 꼽고 있다.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은 "구조조정엔 성역이 없다" 고 말한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인데' 하는 식으로는 팔 게 없으며 아까운 것부터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성그룹이나 고려아연처럼 본사 사옥 없이 경영을 잘 하는 기업도 많다. 현대는 계동 사옥을 계열사만 대상으로 할 게 아니라 제3자에게 팔 궁리도 해봐야 한다.

가정집에서는 급하면 결혼 패물도 판다. 외환위기 때는 금붙이까지 다 팔았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고 사옥을 파는 것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민병관 산업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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