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축구 살리기 호들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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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프랑스가 월드컵에서 우승하자 파리 샹젤리제 광장에는 2차대전에서 승리했을 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려나왔다. 우리도 2002년 월드컵에서 이런 즐거움을 맛볼 수 있도록 하자. "

정부가 2002년 월드컵을 1년7개월여 앞두고 축구 살리기에 나섰다. 정몽준(鄭夢準)월드컵조직위 공동위원장 겸 대한축구협회장의 희망처럼 한.일 월드컵이 우리의 축제 한마당이 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기필코 16강에는 진출해 개최국으로서의 체면은 구기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최근 체육행정 주무부처인 문화관광부 장관은 이례적으로 월드컵조직위 관계자와 축구인들을 직접 만나 세계 최고의 축구감독을 대표팀에 모셔오고, 선수들에게는 입영 연기 혜택을 주기로 결정했다. 문화부 차관보를 위원장으로 하는 '2002년 월드컵 필승대책위원회' 도 구성한다.

국기(國技)나 다름없는 한국 축구가 아시아에서도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역대 월드컵에서 개최국이 16강에도 진출하지 못한 적은 없다. 그러나 정부까지 다급하게 나서 16강 필승대책기구까지 만드는 나라도 찾아보기 어렵다.

정부가 난데없이 축구대표팀 경기력 강화방안을 들고 나온 이유는 뭘까. 우리는 10개 도시 월드컵 경기장을 건설하는 데 물경 1조9천여억원을 쏟아붓는다.

이렇게 한해 국가예산의 2% 가량을 들여 경기장을 지어 놓고도 조별 예선 세 경기만 해보고 허망하게 탈락할 경우 "남의 잔치상만 거창하게 차려준 꼴" 이라는 여론의 따가운 질책을 피하기 힘들 듯하다.

공동개최국인 일본이 16강 이상 성적을 올린다면 비난 강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몇 개월 뒤 대통령선거를 치르기에는 부담이 적지 않아 정부가 서둘러 나선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런 응급처방식 대책은' 축구 살리기와는 거리가 먼 2002년 월드컵과의 전면전에 나선 것이 아닌가 싶다.

정부가 모양새를 갖추려면 눈앞에 닥친 월드컵 필승대책이 아니라 적어도 10년 앞을 내다보는 축구 발전 청사진을 마련하고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대표팀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누구를 감독으로 데려오든 2002년 월드컵은 축구인들에게 맡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선 월드컵이 끝난 뒤에라도 축구 붐 조성을 위해 경기장 활용방안부터 마련해야 한다. 잠실 주경기장이 서울올림픽을 치른 지 10년이 넘도록 국내 축구를 외면해온 것처럼 수천억원씩 들인 월드컵 경기장을 국내 경기에는 개방하지 않는다면 축구 발전은 요원하다.

잠실 주경기장은 1989년부터 지난해까지 11년 동안 36억원의 적자를 내면서도 국내 프로축구 정상을 가리는 챔피언 결정전조차 한번 열리지 않았다.

반면 마이클 잭슨 내한공연을 유치했던 97년과 99년에는 각각 20억원과 18억원의 흑자를 기록해 경기장인지 공연장인지 착각이 들 정도다.

또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인 축구 복표 사업은 우리 축구 발전에 기폭제가 될 수 있다. 2002년 월드컵이 아니라 우리 축구 문화의 큰 틀을 바꾸기 위해 수익금을 어떻게 사용할지 치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밤잠을 설쳐가며 경기를 지켜보는 우리 축구팬들의 수준을 얕봐서는 안된다. 한국 축구가 위기를 맞은 것은 최근 국제대회 성적이 신통치 못해서가 아니라 이기건 지건 경기 내용이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2002년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하기를 바라지만 탈락하더라도 한국 축구의 도약 가능성만 보인다면 만족할 수 있는 우리 국민이다.

최천식 <체육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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