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문화 산책] 2. 북에도 '뽕짝'은 있다

중앙일보

입력 2000.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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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인간의 정서를 노래만큼 빨리 전달해 주는 매개물이 또 있을까. 대중가요의 강력한 흡인력을 보면 해답은 극명하게 나올 것이다.

북한에서 유행하는 '휘파람' 은 남쪽 젊은층에서도 환영을 받았다. 혁명성을 강조하기보다 단순.경쾌한 멜로디에 청춘의 정서를 담아 인기를 끌었다. 통일문화 형성에서 노래도 한몫 단단히 할 수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북한엔 막상 '대중가요' 라는 말이 없다. '군중가요' '통속가요' 등이 남쪽의 대중가요에 가깝기는 하지만 딱 들어맞는 건 아니다. 문화환경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북한에도 군중이 즐겨 부르는 노래는 무수히 많. 지난 8월 국내 언론사 사장단이 평양에 갔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측 대중가수로 이미자씨를 거론했다.

왜 하필 이미자일까. 두말할 것 없이 '이미자적 정서' , 세칭 '뽕짝' 이라고 하는 '트로트 풍' 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에서 트로트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오늘날 북한 음악의 핵심은 두말할 것 없이 '민요' 다. 일제는 일본식 엔카(演歌)를 보급, 민족음악을 대체하려고 기도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해방 이후 북한 음악계는 민족음악적 요소인 민요 등을 발굴, 전승하는 사업에 재빨리 뛰어들었다. 음악에서의 왜풍(倭風)을 말끔히 청산한 것. 그러나 당의 문예정책 같은 공식문건만 봐서는 북한 문화를 제대로 읽어 낼 수 없다.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사라졌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여전히 '트로트적 정서' 가 넓게 깔려 있다. 현재 북한 정권의 핵심 실세들은 60대 이상이며, 이들의 정서는 아무래도 우리의 전통가요, 즉 트로트에 가깝다.

물론 북한 음악계도 트로트가 퇴폐적이고 왜색이 짙다며 비판하지만 '비공식적 권위' 는 여전하다. 노인들의 술자리엔 어김없이 트로트를 만날 수 있으니까. 근년 들어서는 새로운 평가도 나타나고 있다.

트로트의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일제시대 그래도 '일정한 역할' 을 수행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는 것. 남북 음악교류가 활성화되면 30, 40년대의 '계몽기 가요' , 즉 트로트도 남북 모두 재평가받을 조짐이 보인다.

이미자.은방울자매.나훈아.남진 등은 '괜찮은 평가' , 재즈.블루스.랩.록 등은 '언짢은(혹은 서먹서먹한) 평가' 를 받게되지 않을까. 포크송 계열은 조금 사정이 낫겠지만 쉽게 먹혀들 것 같진 않다.

북한 주민들에게 우리의 전통가요가 어느 정도 인정받는다고 해서 '혁명가요' 나 민요조 노래가 밀린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정치사상 문화로서의 '혁명가요' 가 있다면, 사람들을 조금은 편하게 해주고 즐겨 부를 수 있는 '통속가요' 가 다른 축을 형성한다고 본다.

그러나 혁명만으로 살 수는 없는 일. 어느 세상이나 '틈새 시장' 은 있게 마련이다. 트로트는 이렇듯 비공식 틈새시장을 차지하면서 노년층을 중심으로 정서적인 친밀감을 폭넓게 확보하고 있다.

주강현 <우리민족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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