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생존외교 허와 실 느끼게 한 인도의 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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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호 07면

중앙SUNDAY 2010년 1월 24일자 지면.

중앙SUNDAY는 24일 한·인도 정상회담을 앞두고 스페셜 리포트로 ‘Incredible India-수퍼 코끼리가 뛰기 시작했다’를 실었다. 1, 5면엔 우주과학자인 압둘 칼람 전 대통령의 인터뷰도 담았다.

취재일기

지난 11~18일 취재 중 경험한 에피소드 하나를 먼저 소개한다. 인도 우타르 프라데시 주 아그라의 시칸드라에 갔을 때다. 시칸드라는 무굴 제국 제3대 황제 악바르의 무덤이 있는, 페르시아와 인도 양식이 융합된 화려한 돔형 건축물이 모여 있는 곳이다. 흰색 대리석으로 장식된 천장에 불쑥 튀어나온 검은색 구조물들이 눈에 띄었다. ‘무슨 건축 양식일까’. 다가가 보니 거대한 벌집 10여 개가 천장을 점거하고 있었다. 지나던 길이라 본격 취재는 못한 채 델리로 왔다. 교민들에게 물었다. 4~5년 전에도 벌집을 봤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왜 119 같은 당국에 얘기를 하지 않나요”(기자)
“사람이 다쳐도 안 오는데, 벌집 치우러 오겠어요? 아파트 창문 앞에도 벌집이 있어요.”

시칸드라 벌집 사례는 인도에 만연한 관료주의, 막힌 행정 서비스의 한 예다.
사실 출국하는 날까지, 취재 일정조차 확정되지 않았다. 한국 같으면 반나절이면 충분할 ‘OK’ 사인이 요청 일주일이 지나도 없었다. 인도과학원, 인도공과대(IIT), 초등학교 다 마찬가지였다. 11일 밤 공항에 도착한 뒤 취재 일정이 한꺼번에 잡히는 바람에 국내선 비행기를 하루에 세 번 갈아탄 적도 있다. 그렇지만 일단 취재에 응한 이상, 그들은 정성껏 취재에 응했다. 압둘 칼람 대통령을 비롯, 기자가 만난 모든 과학자와 교수들은 소탈하고 겸손했다.

인프라 부족, 주(州)와 주 사이에도 관세 장벽이 높은 지방 분권주의, 관료들의 부패, 빈부 차, 그리고 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느려서 속 터지는 인도인들의 여유와 인내심…. 이런 단점들이 있지만, 인도는 한국이 새롭게 다가서야 하고 그럴 가치가 충분히 있는 나라임에 틀림없는 곳이다. 20년 이상 산 교민들은 “인도인들은 한번 관계를 트면 신뢰하고, 정을 주고받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24일 기사가 나간 뒤, 독자들의 반응은 다채로웠다. “갠지스 강의 종교적 풍경만 떠올렸는데, 과학과 수학의 힘이 넘치는 나라란 사실을 알게 됐다”는 의견이 많았고 “인도 맨파워에 대비되는 한국 IT의 현실을 다시 보게 됐다”는 반응도 있었다. 우리 외교 지평의 확대란 점에서 의미를 부여하는 의견도 많았다. 외교 관련 종사자들은 “한·미, 한·일, 한·중 이런 단어만 떠올리다가, 한·인도라는 큰 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준 계기가 됐다”고 했다. 이제부터라도 지난 60년간 해온 4강 생존외교의 틀을 벗어나 인도와 브라질, 중동, 아프리카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만모한 싱 인도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위해 인도로 출발한 24일, 비행기에서 인도 스페셜 리포트를 읽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이날 저녁 첸나이에 도착하자마자, 칼람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내 친구 칼람 대통령”이라며 안부를 전했다. 이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2007년 당시 대통령이던 칼람을 대통령궁 무굴정원에서 만났고, 글로벌지식플랫폼(GKP)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한·인도 과학지식 교류협력 사업을 추진했다.

27일 벵갈루루에서 열린 한·인도 과학기술교류센터(소장 정해룡) 개소식엔 칼람 대통령과 이 대통령을 수행한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참석했다. 칼람 대통령은 개소 기념 연설을 했는데, 그 연설문을 29일 기자에게 보내줬다.

28일 인도 정부 산하 우주연구소(ISRO)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항공우주 기술을 자랑하듯, “2016년 첫 유인 우주선을 발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9일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세계 금융위기를 겪으며 더욱 강해진 인도의 영향력과 힘을 분석하는 ‘인도와 세계화’ 스페셜 리포트를 내보냈다. 한국에 인도는 더 이상 관광지로 주목받았던 ‘빈자의 나라’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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