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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오늘 이 순간부터 덕 보겠다는 생각 버려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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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호 20면

“부부는 남이다. 남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다…. 비밀의 방을 가져라. 그 안에 자기 나름의 삶이 있다. 결혼 했다고 버리지 말고 함께 가꿔 나가라 ….”

감동이 있는 명품 주례사

박노해 시인이 2002년 가수 윤도현씨의 결혼식에서 얘기했던 주례사 중 일부다. 결혼 후 윤씨는 여러 인터뷰에서 자신의 결혼식 주례사가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박씨의 주례사는 부부가 하나임을 강조하는 상투적인 주례사와는 다르다.

무턱대고 좋은 얘기만 늘어놓은 비평을 꼬집을 때 '주례사 비평'이란 말을 쓴다. 주례사에 상투적인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빗댄 것이다. 흔히 주례사 하면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평생 지켜주겠는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겠는가?’를 떠올린다.

그런 주례사는 감동도 없고 기억에도 남지 않는다. 결혼 정보회사 선우가 최근 5년 사이 결혼한 부부 202명에게 물어본 결과 주례사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람(49%)이 기억하는 사람(42%)에 비해 더 많았다. 경황이 없기도 하고,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주례사는 한 번 읽혀지고 사라진다. 결혼식 이후에 다시 언급되는 경우도 많지 않다.

신랑ㆍ신부, 하객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오래도록 기억하는 주례사가 있다. 조영호(56ㆍ아주대 경영학과) 교수는 부인 이재남(56)씨와 함께 주례를 선다. 부부는 2005년 이후 지금까지 34번의 주례를 섰다. 혼인서약은 남편이, 성혼 선언문은 부인이 읽는다. 주례사는 한 단락씩 나누어 한다. 조 교수는"결혼식은 남녀가 함께 꾸미는 것인데 남자 혼자 주례를 보는 것보단 남녀가 함께 보는 게 더 의미 있을 것 같아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전업주부인 부인이 쑥스러워하고 긴장도 많이 해 힘들었지만 이제는 능숙하게 진행한다. 두 사람의 주례사는 독특한 데가 있다. 예비 부부에게 결혼생활을 하면서 지킬 약속을 구체적으로 써오게 한 뒤 식장에서 낭독한다. “서로 싸우더라도 한 이불은 덮고 자겠습니다. 남의 집 남편, 부인과 비교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식이다. 약속을 낭독하고 하객들 앞에서 실천을 다짐받은 후 조 교수 부부의 본격적인 주례가 시작된다. “여보, 당신은 이 '사랑의 약속'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어요?”라며 조 교수가 시작하면 부인은 약속을 하나씩 언급하며 조언을 해 준다. 두 사람이 만담하듯 한 번씩 주고받으며 선배 부부로서의 경험을 얘기한다.

특별한 인연으로 주례를 서는 경우도 있다. 소설가 이윤기(63)씨는 2001년 겨울 800자 원고지 10장 분량의 편지를 받았다. 생면부지의 청년이 주례를 부탁하며 보낸 편지였다. 대학 시절부터 이씨의 작품을 좋아했던 조희봉(41ㆍ강원 상서우체국장)씨는 “독자로서 굉장히 존경하던 분이라서 어릴 때부터 나중에 결혼하면 꼭 주례를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다”며 “하지만 워낙 유명한 분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조씨는 ‘하늘의 문’이란 이씨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하우스만 신부의 결혼식 주례사’를 보고 자신의 주례사도 이렇게 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편지를 보내고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나 이윤기인데, 결혼식 날 화천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이씨의 전화를 받았다. 이씨는 “주례 같은 걸 매우 싫어하지만 기꺼이 나섰던 이유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젊은 부부를 격려해 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씨는 결혼식 당일 “그대를 위하여 내가 있는 것이지, 나를 위하여 그대가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윤기 소설 속 주례사를 현실에서 들으며 “책 속에서 사람이 살아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기억했다.

정토회 법륜 스님의 주례 법문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져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주례사는 신혼부부뿐 아니라 결혼생활을 시작한 지 꽤 시간이 지난 부부에게도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그는 “두 사람은 오늘 이 순간부터는 덕 보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아내에게, 내가 남편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이렇게만 생각하면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고 말한다. 상대방 덕 볼 생각으로 결혼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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