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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랭보’ 천재시인 미제간첩 몰려 北에서 처형

중앙일보

입력

임화의 시는 다르다. 아름다움이 있다. 기법이 무엇이든, 형식이 무엇이든, 사상이 무엇이든 아름다움이 있어야 예술인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좌우는 없다. 이 해 그는 가장 뛰어난 시군(詩群)에 속하는 <우리 오빠와 화로><네거리의 순이> 등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일약 조선 문단의 대표주자로 떠오른다. 그의 나이 21세 때의 일이었다.

북의 시인

강준식의 정치비사 | 임화의 비극 #그의 시는 다시 살아나 대한민국 교과서에도 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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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기자는 동시대의 저널리즘에 종사하는 자이고, 역사가는 지난 시대의 저널리즘에 종사하는 자일지도 모른다. 가까운 사건을 다루는 기자든, 먼 사건을 다루는 역사가든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상식이다.

1962년 <중앙공론>이라는 일본 잡지에 <북의 시인>이라는 소설이 연재됐다. 작가 마쓰모토 세이쵸오(松本淸張)는 당시 일본 개인 세금납부 1위였던 만큼 그가 쓴 작품은 한국에서도 화제가 되었다. 같은 해 5월 한국을 방문한 히라바야시 다이코(平林たい子)라는 여류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글쎄요…. 그런 작가는 사고라는 것이 없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쓰는데, 몇 사람의 비서를 채용해 자료를 모아오게 한 다음 그 자료를 가지고 쓸 뿐이죠.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면 마쓰모토 세이쵸오 같은 작가는 상당히 반미인데요. 그 이유는 비서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어요. 때문에 그런 자료를 모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마쓰모토는 인간이 아니라 타이프라이터입니다.”(<사상계> 1962년 8월호)

이를 전해 들은 마쓰모토는 “사무 처리를 하는 도우미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사실에 반하여 문단 경력이 오래 된 선배가 외국에서 익명란에나 있을 법한 발언을 하는 심경을 모르겠다”고 히라바야시를 반격했다.(<일본독서신문>, 1962년 10월12일)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논쟁은 공방을 거듭하다 그후 <산케이신문><문예춘추>로 옮겨지면서 마쓰모토가 고용한 공산주의 비서가 누구냐 하는 문제로 바뀌었다. 해방 전 <경성일보> 기자를 하다 일본으로 건너간 김달수(金達壽) 씨와 <문예춘추>의 오오타케(大竹宗美) 기자가 지목되었지만, 실은 마쓰모토 자신이 일본공산당을 지지하던 ‘사회파 작가’이기도 했다.

<북의 시인>의 주인공은 조선의 천재시인 임화(林和)다. 그 줄거리는 해방 후 결핵이 심해진 임화가 미군정으로부터 약을 타먹다 해방 전 총독부 경찰에 전향서를 썼던 약점 때문에 미군정의 스파이 짓을 하게 되었고, 이로써 1953년 ‘미제간첩’으로 재판에 회부돼 사형당했다는 내용이다. 그렇다면 실제의 임화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시인 이상과 고보 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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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임화.
1908년 서울 동숭동 동쪽 낙산 기슭에서 소시민의 아들로 태어난 임화(본명은 임인식·林仁植)는 자상한 아버지와 어머니 슬하에서 ‘행복된’ 소년시절을 보냈다고 스스로 술회한 바 있다(<삼천리>, 1937년 1월호). 동대문 안 사립학교를 다니다 열 살 때 보통학교로 편입했고, 이어 보성고보에 진학했다.

당시 60명의 동기생 가운데는 시인 이상(李霜), 평론가 이헌구, 시나리오작가 김유영, 정치인 이강국·유진산 등이 있었고, 1년 밑에는 시인 김기림, 평론가 김환태·조중곤 등이 있었다. 그는 학창시절 하이네·폴 베를렌·카를 부세의 시를 읽었고, 빅토르 위고·고리키·톨스토이·투르게네프·셰익스피어·괴테 등의 소설을 섭렵했다.

‘행복된’ 시절이 깨어진 것은 집안이 파산한 1925년께였다. 보성고보 5학년이던 그는 학교를 중퇴하고 교과서를 판 돈으로 당시 유행하던 ‘도리우찌(헌팅캡)’를 사 쓰고 일본인거리 혼마찌(충무로)에 가서 <개조> 등 일본 잡지를 사보았다. 그리고 그 잡지에서 데이비드 리카도니 알렉세예비치 크로폿킨이니 막스 스티르너니 하는 이름을 알게 된 후 엄청난 양의 사회과학서적을 독파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미래파나 표현파에 빠져 그림 습작을 하기도 하고, 다카하시 신기치(高橋新吉)의 시를 읽기도 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상시에서 모더니즘과 다다이즘 시를 창작하기에 이른다. 그는 시와 감상문을 투고했고, 이것이 신문에 게재된 것을 계기로 시인 이상화, 소설가 윤기정, 평론가 박영희를 만나면서 카프(KAPF)에 가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단체 안에서 이기영·송영·김팔봉·최서해·김영팔·김복진·최승일·박팔양·안석영 등과 교우관계의 폭을 넓혀갔는데, 이것이 1926∼27년의 일이었다. 1928년에는 영화 <유랑><혼가> 등에 주연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젊은 날의 그는 청춘물에 등장해도 좋을 정도의 미남이었던 것이다.

임화의 성장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방대한 독서를 통해 서구 사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이를 우리 문학에 맞게 한국적 모습으로 적용해 작품으로 잉태시켰다는 점이다. 이 무렵 그는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의 시로부터 이야기시 또는 단형서사시의 형식을 배우지만, 나카노의 <비 내리는 시나가와역>과 임화의 <우산 받은 요꼬하마의 부두>를 비교해보면 선이 굵은 임화의 시가 더 낫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화의 문학적 재능은 10대 시절 불멸의 시 작품을 남긴 랭보를 연상시킨다. 흔히 그의 고보 동기인 이상을 천재시인이라고 한다. 그렇게 불리게 된 데는 그의 기이한 행적과 폐병으로 인한 요절이 한몫 한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그의 어떤 시가 천재적인가? 기이성은 있어도 나는 그의 실험시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임화의 시는 다르다. 아름다움이 있다. 기법이 무엇이든, 형식이 무엇이든, 사상이 무엇이든 아름다움이 있어야 예술인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에 좌우는 없다.

이 해 그는 가장 뛰어난 시군(詩群)에 속하는 <우리 오빠와 화로><네거리의 순이> 등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일약 조선 문단의 대표주자로 떠오른다. 그의 나이 21세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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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가 1951년 2월26일 쓴 시 <평양>.

카프의 서기장

1929년 임화는 연극을 공부하러 도쿄(東京)로 건너간다. 일본 대학에 적을 두었다는 자료도 보이지만 다른 자료들은 그가 동경도쿄에서 김남천·안막·한재덕·이북만·김두용 등과 교유하면서 <무산자(無産者)>라는 잡지를 편집했다고 전한다. 편집실은 카프의 도쿄지부장인 이북만의 살림집이었다.

임화는 그 집에 얹혀살면서 “사회과학서의 난독에 몰두”하는 한편 이북만의 여동생으로 무산자 연극부의 헤로인이었던 이귀례(李貴禮)와 부부관계를 맺는다. 1931년 귀국한 임화는 카프 확대회의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지만 곧 불어 닥친 검거선풍에 맹원 70여 명이 연행되었다. 임화는 불기소 석방된 뒤 곱상하게 생긴 이귀례와 혜화동에 살림을 차리고 그해 12월 딸 혜란(惠蘭)을 낳는다.

1932년 4월 임화는 카프 서기장이 되고, 기관지 <집단>의 편집책임자가 된다. 어떻게 기라성 같은 고학력의 문단 선배들을 제치고 고보 중퇴의 그가 24세의 나이에 서기장이 될 수 있었을까? 그의 천재적 시와 한국 근현대 비평사에서 아직까지 뛰어넘은 이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뛰어난 그의 평론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1934년 5월 카프에 대한 제2차 검거가 단행될 때 한설야·백철 등 80여 명의 맹원이 연행됐으나 카프의 서기장인 임화는 구속을 면했다. 이에 대해 문학평론가 백철은 “서기장 임화가 빠졌다는 것은 세상의 의혹을 살 만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당시 임화의 폐병이 도졌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그는 결핵요양소가 있는 마산으로 요양을 갔고 거기서 미모의 지하련(池河連)을 만난다. 지하련은 일본 쇼와(昭和)고녀에 도쿄경제전문학교까지 유학한 당대의 인텔리 여성으로, 마산에 요양하러 내려온 임화에게 반해(1940년 단편소설 <결별>로 등단하는 지하련은 문학에 뜻을 두고 있었다) 결혼하게 된다.

그 무렵 임화는 첫 부인 이귀례와 이혼한 상태였다. 1935년 임화는 김남천과 상의해 카프의 해산을 결정했는데, 북한 <기소문>에는 그가 “1935년 6월 하순 경기도 경찰부 주임 사이가(齋賀七郞)와 탑골승방에서 만나 사이가에게 임화 자신이 서명한 ‘카프’ 해산 서명서를 제출하고 일제와 완전 결탁했다”고 자백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무렵 생활비를 벌기 위해 1년에 30편씩 양산한 그의 평론을 읽어보면 일제에 대한 저항과 협력 사이의 묘한 경계선에 머무르며 적극적인 시국협력과는 분명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인식할 수 있는데, 이 점은 노골적 친일로 돌아선 당시의 많은 전향 문인과 차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1936년 총독부가 조선어 말살정책을 내놓자 <조선중앙일보>에 ‘조선어와 위기 하의 조선문학’을 9차례나 발표하며 조선어 옹호론을 전개하기도 했다.

또 일제의 전시체제가 가동하자 그는 아내 지하련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세상이 소란해 마음 둘 곳이 없는데 너는 앓고 아이들은 가엾고 나는 고달프고 쓸쓸하다”(<여성>, 1940년 10월호)며 저명시인으로서 당국의 압박에 시달리던 심경을 내비친 바도 있다.

그러나 임화는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황국위문작가단>과 <조선문인보국회>에 이름을 올리고 군국주의 선전영화인 <너와 나>의 대본을 교정보기도 했는데, 이 같은 흔적은 훗날 간첩죄를 뒤집어쓰는 방증의 하나가 된다.

임화는 정말 미국간첩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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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부터 임화의 비평집 <문학의논리> 표지, 임화가 주도한 조선문학가동맹의 기관지 <문학> 1·2·3호지 표지.
임화는 뻔뻔한 성격은 못 되었다. 그래서 해방 후 지난날의 친일행각을 참회한 부분이 있는 시 <또 다시 네거리에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안면을 바꿔 애국자연하는 부류가 태반이던 해방정국에서 이만큼의 자기고백을 한 인사도 드물다.

하지만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꿈꾸었던 임화는 과거의 행적 때문에 위축돼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해방이 되자 오히려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 문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다음날인 8월16일 김남천·이원조와 함께 ‘조선문학건설본부’를 만드는가 하면, 8월18일에는 그 상부조직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조직해 그 서기장에 취임함으로써 카프 시대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12월3일에는 순수문인과 중간노선의 문인들을 대거 참여시킨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을 주도했다.

또 1946년 2월8일에는 ‘전조선문학자대회’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 뒤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이론적 구심점으로 활동하면서 문학의 정치투쟁 등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의 외곽세력으로 움직였다. 정치활동 또한 구체적으로는 보성고보 동기인 이강국이 사무국장으로 있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기획차장으로 일하면서 공산당의 문화정책을 수립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 조선공산당→남로당의 활동이 불법화되고 당 지도부가 대거 월북하자 그도 1947년 10월께 월북한다. 그는 평양으로 가지 않고 해주에 머무르면서 제1인쇄소를 거점으로 대남공작에 종사하다 6·25가 터지자 서울로 내려와 ‘조선문화총동맹’을 조직하고 부위원장을 역임한다.

그러나 휴전협정 사흘 뒤인 1953년 7월30일 그는 남로당 간부 11명과 함께 ‘미제간첩’으로 기소돼 8월6일 사형을 선고받은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여기서 의문은 임화가 북한의 주장처럼 정말 ‘미제간첩’이었나 하는 점이다. 당시 북한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의 심문기록에 임화는 “1945년 10월 미군 CIC(방첩대)와 결탁해 간첩행위의 길에 들어섰다”고 답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기록은 지금까지는 김일성파의 ‘6·25 패전에 대한 책임전가용’으로만 인식됐으나 2001년 9월4일 미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돼 있던 ‘베어드조사보고서’에 이강국·임화, 그리고 성명 미상의 선전부장 등이 미군 CIC와 연계되었다는 1949년도의 기록이 방선주·정병준 교수에 의해 발견됨으로써 북한의 재판기록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대두했고,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미군 정보기관이 북한에 위장침투시킨 성공사례의 하나였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이는 과연 사실일까? 얼핏 CIC의 두 자료는 일치한다. 하지만 사료란 전후 사정을 면밀히 살펴 해석해야만 하는 것이다. 임화가 미군 CIC와 결탁했다는 날짜는 1945년 10월이다. 그런데 조선공산당의 분위기는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좌익신문사 정간→박헌영·이강국·이주하 체포령에 맞선 ‘9월 총파업’의 1946년 9월까지 조금도 위축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 1년 전인 임화가 CIC와 결탁했다는 1945년 10월은 좌익 전체가 의기양양할 때였다. 그런 시기에 자신의 ‘전성시대’를 보내던 임화와 ‘10년 후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좌익의 기대를 모았던 이강국과 당 선전부장이 나란히 CIC의 앞잡이가 됐다는 것은 난센스다.

첩보학에서는 ‘타협(Compromise)’이 첩자가 되는 4대 동기(돈·이데올로기·타협·자아)의 하나로 보기 때문에 <북의 시인>에서는 임화가 해방 전 전향했던 약점을 은닉하기 위해 미군과 타협했던 것으로 그렸지만, 혹독한 일제강점기에 전향하지 않았던 인사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은 약하다.

오히려 임화·이강국·선전부장이 역으로 미군정 정보를 얻어내기 위해 CIC에 접근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에 대해 해방직후 <민주일보><민중일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한 최태응(崔泰應)은 “당시의 미군기관 안에 침투했던 좌익세력은… 군정청 내부 동향이나 정치·사회적 추이에 관해 미리 알아내는데도 민족진영보다 공산당 측이 빨랐다”(<사상계> 1963년 3월호 ‘임화의 비극’)고 회고했는데, 그것이 해방 직후를 체험한 세대의 상식이었다.

임화의 간첩설을 한층 더 깊게 한 것으로는 ‘김수임사건’을 재조명하면서 AP통신이 2008년 8월16일자로 보도한 “1956년 미 육군 정보부에 의해 작성된 한 기밀 파일에 의하면 이강국은 CIA 비밀조직인 ‘코리아합동활동위원회(JACK)’에 고용된 적이 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는 기사다.

미국의 대외첩보기관인 OSS는 2차대전이 끝나면서 해체됐고, 그 후 여러 수사기관을 느슨하게 통괄하는 중앙정보그룹(CIG)이 그 기능을 대신하다 1947년 9월 CIA가 창설됐다. 그런데 이강국이 월북한 것은 CIA가 창설되기 1년 전인 1946년 9월 초다.

따라서 찰스 헨리 기자가 쓴 ‘CIA의 비밀조직(JACK)’이란 결국 미군 CIC가 운영하던 대민접촉기관이고, 그 기록을 CIA가 1956년에 와서 다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헨리 기자는 사료를 제대로 다룰 만한 지식도 없이 역사적 사실을 이것저것 섞어 기사를 쓰는 바람에 이강국이 마치 CIA 첩자이고, 그의 고보 동기인 임화 또한 CIA 끄나풀이었던 것 같은 인상을 주었을 뿐이다.

임화와 설정식

그런데 북한의 ‘판결문’에 보면 임화는 “1945년 12월부터 미군 정탐기관 또는 남조선 미군정청 공보처 여론국장이었던 공동피소자 설정식 등과 련계를 맺고 당 및 문화단체의 중요비밀을 제공하였다”고 하여 임화와 CIC의 연결고리에 설정식(薛貞植)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임화의 ‘미제간첩’ 여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공동피소자 설정식이 어떤 인물이었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설정식은 본래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연희전문 문과를 거쳐 미국 오리건주의 마운트유니언대학과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원에 유학하고 귀국한 뒤에는 셰익스피어를 번역하기도 한 영문학자로 해방 후 미군정청 공보처 여론국장에 취임했다. 그런 그가 북한 ‘판결문’에는 “1946년 9월 공동피소자 림화의 보증으로 자기의 정체를 은폐하고 당에 잠입하였으나 1949년 12월 변절”했다고 되어 있다.

당시 한국인 여론국장은 단 1명뿐으로 두드러진 존재였는데 어찌 신분을 속일 수 있겠는가? 더구나 설정식은 이미 1932년 조선문단에 정식 등단한 시인이었다. 시인인 그가 시인인 임화를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해방 직후 문인들과의 교류가 많았던 소설가 최태응은 “설정식은 해방과 더불어 임화·이원조 등과 일상 가까이 지냈으며, 그를 구태여 미군 스파이라거나 반대로 남로당의 프락치라고 하기에는 그 어느 쪽에도 부합되지 않는 중간파의 전형”이라고 증언했다(<사상계>, 1963년 4월호).

북한 ‘판결문’에는 설정식이 1946년 9월 임화의 보증으로 남로당에 입당해 1949년 12월 변절했다고 했는데, 그는 원래 1945년 11월부터 여론국장으로 있다 1947년 1월부터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사무차관으로 근무했고, 북한이 변절했다고 기록한 1949년 12월에는 좌익 영자신문 <서울타임스(seoul times)>의 주필로 있었는데 무슨 변절을 했다는 것인지 아리송할 뿐이다.

설정식은 6·25를 서울에서 맞았다. 그는 스스로 ‘작가동맹’을 찾아갔고, 거기서 인민군과 함께 내려온 임화 등 ‘조선문학가동맹’ 시절의 옛 친구들을 만나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임화의 보증에도 북한당국은 남한에 있던 그를 ‘작가동맹’의 일원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대신 미군정청 고위관리 출신으로 영어실력이 뛰어난 그를 ‘자수’ 형식으로 ‘의용군’에 자원입대시킨 뒤 인민군과 중공군 간의 수석연락장교 통역관으로 차출해 썼다. 그러다 휴전회담이 개시된 1951년 6월부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정치총국 제7부’에 배속해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북한측 영어 통역관으로 근무하게 했다.

계급은 인민군 소좌였다. 그런 그가 정전협정이 조인된 지 3일 만에 느닷없이 미제간첩으로 기소됐던 것이다. 이상의 경과만 살펴보아도 설정식은 미제간첩으로 북한에 위장침투한 것이 아니라 인민군이 필요해 차출해 쓰다 버린 경우였다. 따라서 그를 연결고리로 하여 임화를 미제간첩으로 몬 북한 ‘판결문’도 엉터리였음을 알 수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임화가 미제간첩이 아니었다는 것은 그의 행적을 살펴봐도 드러난다. 그가 월북 전부터 천재 작곡가 김순남과 콤비를 이루어 만든 <해방의 노래><해방조선의 노래> 등 많은 노래 가운데는 <인민항쟁가>가 있다. 임화가 작사하고 김순남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당시 북한에서 국가(國歌) 대용으로 불렸고, 남한에서도 널리 유행하여 남한 경찰관이 이 노래를 무심결에 흥얼대다 옷을 벗는 일이 생길 정도였다.

이에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1947년 8월 임화와 김순남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임화는 이를 피해 그해 10월께 월북했던 것이다. 그 무렵 북으로 넘어간 문인은 모두 100여 명에 달했는데, 임화는 그들 월북문인의 총수격이었다.

그는 박헌영의 지시에 따라 평양으로 올라가지 않고 친구 이원조가 있는 황해도 해주에 머물며 대남공작에 목적을 둔 당 기관지 <노력자><인민조선> 등의 선전책자를 편집·배포하는 일을 담당했다. 공식적으로는 ‘조쏘문화협회’ 부위원장과 그 기관지 <조쏘문화>의 주필을 맡았지만, 임화는 먼저 월북하여 김일성의 총애를 받던 소설가 한설야·이기영·송영 등에 의해 극도로 견제를 당했다.

그러다 6·25가 터지자 인민군을 따라 서울로 내려와 조선문화총동맹을 결성하고, 첫 부인 이귀례와 사이에 낳은 딸 혜란이를 생각하며 쓴 <너 어느 곳에 있느냐>와 <바람이여 전하라> 등의 종군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들 시는 당시 ‘완숙한 금자탑적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한설야의 사주를 받은 엄호석 등으로부터 <로동신문><문학예술>을 통해 비판받는 것을 신호탄으로 임화는 1953년 남로당 핵심 간부들과 함께 미제간첩혐의로 체포된다.

심문을 받는 도중 안경알을 깨 그 파편으로 동맥을 끊고 자살을 시도했던 임화는 결국 그해 8월6일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된다. 그의 나이 45세 때였다. 전쟁 중 만주에 소개돼 있던 그의 두 번째 아내 지하련이 소식을 듣고 뒤늦게 평양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시신은커녕 흔적조차 찾을 수 없자 이 여류소설가는 치마끈도 제대로 매지 못한 실성한 모습으로 평양 시내를 헤매다 내무서원에게 붙들려 평북 회천 부근의 산속에 있는 교화소에 수용됐고, 거기서 1960년 초 병사했다.

임화와 지하련 사이에 태어난 어린 남매의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문학과 사상과 정치의 전위에 섰던 임화의 비극적 종말은 격동의 한국현대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80여 편의 뛰어난 시작품과 300편이 넘는 방대한 양의 평론과 ‘문학사’로 한때를 풍미했던 그의 문학도 절멸되었다. 북한에서는 물론이고 남한에서도 1987년까지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불법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한다. 당대를 지배하던 유행도, 가치관도, 사상도, 그 무엇도…. 지금 임화의 시는 다시 살아나 대한민국 교과서에까지 실렸다. 그래서 옛사람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준식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와 미국 일리노이대·플로리다테크대학 등에서 문학·정치학·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6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유신 말기와 5공 중반까지 <시카고·뉴욕 동아일보><뉴욕 조선일보> 등에서 편집국장·논설주간 등을 지냈으며, 한때는 정치권과 공기업 등에 몸담기도 했다.

저서로는 <서양바람 동양바람><다시 읽는 하멜표류기><김우중의 대도전><혈농어수(血濃於水)> 등이 있으며, 평역서로는 <쓸모없는 것이 쓸모있다-장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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