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시위를 당기니 내가 없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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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쏘기의 선
원제 Zen in der Kunst des Bogenschiessens
오이겐 헤리겔 지음, 정창호 옮김, 삼우반, 127쪽, 9000원

소설 『연금술사』로 일약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브라질 출신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가 젊은 시절 감동 깊게 읽었다고 밝혀 주목을 끌었던 책이 바로 『활쏘기의 선』이다.

저자 오이겐 헤리겔(1884~1955)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헤겔을 전공하고 모교 교수가 돼 강의하던 1924년 일본 도호쿠(東北) 제국대학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 6년간 체류하며 철학을 가르친다.

이 때 헤리겔의 마음을 붙들었던 게 활쏘기와 선(禪) 사상. 일본을 경험한 뒤 헤리겔의 사상은 칸트에서 선 사상으로 180도 돌아섰다고 한다. 이성과 논리를 신봉하는 서양의 철학교수가 동양적 사유 중에서도 논리 초월적인 경향의 선불교도가 된 것이다.

물론 헤리겔의 ‘변심’에는 배경이 있다. 학창시절부터 은밀하게 신비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헤리겔은 자연스럽게 ‘어떻게 하면 신비가가 될 수 있는가’‘단지 주관적인 초탈이 아닌 진정한 초탈의 상태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같은 궁금증을 품게 됐다. 하지만 그가 접할 수 있었던 서적들은 초탈 또는 신과의 합일에 대한 어렴풋한 윤곽만을 제시할 뿐이었다. 그런 헤리겔에게 동양의 선은 신비주의의 동양적 발현으로 받아들여졌고 마침 선 전통이 살아있는 일본으로부터 초청장이 날아 든 것이다.

활쏘기는 헤리겔이 선 사상에 접근할 수 있는 일종의 우회로였다. 일본의 영적 지도자들이 그에게 선 사상을 가르치기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선을 맛볼 수 있는 일종의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활쏘기의 선』은 헤리겔이 처음에는 시위를 끝까지 당기기조차 힘들었던 거대한 활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기까지 6년 간의 고통스러운 수련 과정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헤리겔이 활쏘기의 기예를 체득하는 과정은 ‘선 사상의 비밀’에 다가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책 곳곳에서 활쏘기 기예의 비밀을 전하는 대목은 선 사상의 요체를 표현해 놓은 글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흡사하다.

가령 활쏘기 기술은 더 이상 현대전에서는 쓸모 없는 무예로 전락했다. 하지만 궁사의 입장에서 보면 그 활쏘기가 자신과의 대결인 한에 있어서는 여전히 생사가 걸린 문제로 소개된다. 또 활쏘기 기예는 궁극적인 단계에서는 기예가 기예 아님이 되고, 쏨은 쏘지 않음으로, 또는 활과 화살이 없는 쏨이 된다. 스승은 제자가 되고 명인은 초심자가 된다는 것이다.

논리와 이성이 사고의 중심이 돼 있다는 점에서 헤리겔과 우리의 출발점은 같을 것이다. 기예의 습득 단계에 따라 자세히 소개되는, ‘비논리’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흥미롭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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